-'Call me by your name'-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은 여름날 찾아온 올리버와 엘리오의 이야기다. 둘이 사랑에 빠지고, 고백을 하고, 이별을 하기까지의 평범한 시나리오.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는 그저 잔잔하다. 하지만 영상미이며, 각 장면마다 흘러나오는 음악과의 절묘한 조화는 나를 영화로 물들게 한다. 영화에서 비춰주던 섬세한 감정선은 잊히지가 않는다. 천국 같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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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그려내는 방법이 마음에 와 닿았다. 찾아온 새로운 감정이 엘리오를 변하게 만드는 장면이 곳곳에 드러나는 걸 보면서 느꼈다. 자신을 무너뜨리는 사랑. 타인의 사소한 것에 귀를 기울이는 사랑.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라는 제목부터 고정되지 않는 사랑을 말한다.
우선 영화 초반에 엘리오는 올리버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올리버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몸이 뻣뻣해진다. 더욱 더 심술을 부리고, 말투는 퉁명스러워지고.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라는 메모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에 담담해지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보다 더 거대한 존재다. 나는 그 앞에서 얼어버린다. 얼어버리지 않고 싶어서, 나의 떨리는 감정을 인정하지 않고 싶어서 애를 쓰면서 나를 더 방어한다. 오히려 나의 모든 걸 내어주고 싶은 상대이지만, 내 행동은 그 반대다. 영화는 이 두려움을 직면하고 넘어서는 사랑을 보여준다.
영화 중간 중간에는 엘리오의 변화가 엿 보인다. 올리버의 목걸이를 따라 차고, 올리버의 선글라스를 따라 차고. 본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주관과 가치가 올리버의 것으로 움직인다. 나는 이 장면이 설렜다. 그들이 웃고, 춤추고, 그러한 장면들도 내게 절로 웃음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올리버를 따라 자신도 변하고 싶은 그 욕망.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엘리오의 낮은 자존감. 그걸 묵묵히 지켜봐주는 올리버의 눈빛. 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로 움직이고 있었다. 상대방을 거울로 자신을 비추며 천천히 변해간다.
단순히 나의 하루를 그와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에 움직임을 초래하는 사랑.
그 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정서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인연.
본래 사람은 항상 미세하게 변하고 있다. 그래서 ‘변화’ 그 자체가 특별하지는 않다. 다만, 가끔 전부를 닮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서 내 자신이 상대방으로 뒤덮인다. 이 변화를 수용해도 좋겠다는 편안함과 변해가는 나의 모습이 스스로 마음에 들면서 찾아가는 자존감에 대해서, 그런 사랑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덧. 흔히 변한다는 것은 흔들리는 거고, 약한 거고, 당황스러운 거다. 어릴 때부터 들었던 전래동화가 떠오른다. 하늘을 나는 동물과 땅에 사는 동물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그 둘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했던 박쥐는 모두에게 미움 받으며 동굴로 쫓겨난다. 여기서 어른들은 ‘의리’를 강조한다. 이분법적 사고에서 반드시 한 쪽만을 택하고, 나아가 변하지 말 것을 말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위의 동화는 가장 중요한 논의를 빼먹었다. 동물들은 왜 싸웠는가? 하늘을 나는 동물과 땅에 사는 동물 사이에서 힘의 우위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더 쎄!”라는 과시적 싸움이었다. 박쥐의 잘못보다 이들의 잘못을 먼저 봐야하지 않을까. 또한, 박쥐가 제대로 한 쪽 편을 들지 못했다는 건, 반대로 모두의 입장을 이해하는 화해의 지점이 될 수 있었다는 것. 이는 오히려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방향이라 볼 수 있다.
한 쪽에 치우쳐 고정된 것을 바란다. 주장이 흔들리는 사람에게 약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고정된 건 없다. 우리는 미세하게 변하고, 그에 맞춰 사회도 미묘하게 변하는 중이다. 따라서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하려는 고집은 이 변화를 무시하면서 결국 무너지기 쉽다. 그보다 단단한 자아란, 고집이 아니라 수용이다. 변화에 섬세해지면서 거절하는 또는 원하는 변화를 결정할 수 있는 주체성이다. 나와 다르다고 귀를 닫지 않는 여유. 주변에 귀 기울이면서 솔직하고 담백하게 변화를 체화시키는 사람. 내가 몰랐던 것. 나와 다른 것. 그에 따른 자기변화를 두려워해서 안 된다.
요즈음 학원선생님을 경험하면서 이를 더욱 실감하는 중이다. 학생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노력 속에서 학생의 미미한 변화가 손끝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게 앞으로 나아간 것이든, 옆으로 방향을 튼 것이든. 그렇게 학생이 조금씩 변하는 걸 볼 때 설렌다. 무엇이 변화를 가져다주었을지, 어떤 생각이 새롭게 깃들었을지. 나도 나의 자아가 부스러지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던 기억이 떠오르면, 사람이 변해가는 모습은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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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너의 그 슬픔 그 괴로움을 모두 간직하렴. 네가 느꼈던 기쁨과 함께.”
올리버를 떠나보낸 엘리오에게 아버지가 나지막이 읊어주시는 대사다. 지금 너의 슬픔을 모두 간직하라고. 그 슬픔에 너가 느꼈던 기쁨이 함께 있으니 잊지 말라고. 떼어내지 말라고.
사실 영화를 보기 전, 이 대사를 듣고 영화를 꼭 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엘리오가 올리버의 이별 전화를 받고 장작불 앞에서 묵묵히 눈물을 훔친다. (이 둘은 동성애에 대한 주변의 시선으로 여름날의 사랑을 기억에만 남겨둔다. 현실로 가져오지 못한다.) 보통 엔딩은 해피와 새드로 나뉘는데, 이 영화는 정의할 수 없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사랑을 고백했던 엘리오이기에 그가 느꼈을 상실감은 단순 허무함이 아니었을 거다. 기억의 한 움큼을 떼어내는 고통이었을 거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대로 엘리오의 눈물 속에서 올리버와 느꼈던 기쁨이 느껴져서일까. 엘리오가 훔친 눈물은 절절하기보다, 함께 했던 시간을 삼키려는 눈물이었다. 여름날의 기억이 현재와 미래에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기억을 간직한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하루를 보낸다. 거기서 경험을 쌓고, 오로지 자신만의 감정과 정서를 만들고. 생각을 한다. 이 시간을 축척하는 사람과 잊어버리는 사람. 각각의 방법에 따라 가지게 되는 에너지는 매우 다르다.
저마다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다만, 잊고 싶은 과거를 깊이 간직하면서 변화할 때, 우리는 한 동안 나의 세계에 갇히고, 거기서 다시 나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리고 삶을 대할 때, 자신만의 세계관이 있는 사람의 눈빛은 선명하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했던 생각을 돌이켜보면 ‘우습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만큼 변해왔고, 미래의 나는 또 바뀌어있을 거다. 그래도 고등학생 때의 생각이 소중한 이유는, 내가 이렇게 변해오기까지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 우스운 생각 없이 나는 또 다른 우스운 생각으로 나아갈 수 없었을 거다. 언제 이 글을 읽고 지우고 싶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미래의 변화로 나아가는 데에 밑거름이 되어줄 거라 믿으며 글로써 간직한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