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이 아닌 스물한 살이 된 1월 1일에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주민등록증을 들고 친구들과 호프집에 가는 것이었다. 주민등록증을 내밀고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1년 동안 술집에 갈 때마다 주민등록증을 내밀었지만, 그때 까지는 주민등록증 하나만 있다면 뭔가 자유로워 보이는 느낌이 있었다. 그 나이다운 발상이었다. 두 번째로 내가 했던 일은 사주를 보러 가는 것이었다.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정작 나는 사주를 그렇게 신뢰하지 않는다.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물어보고 싶었다. 내 10대가 왜 그랬던 것일지.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살아있는지 용할 정도로 내 초년 운이 구리다고. 구린 게 어떤 건가요. 선생님? 하고 물었다. 줘도 안 써먹을 운이라 답하시더라. 속으로 용한 분이시네 하면서 웃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10대의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매번 뭣도 모르는 사람이 말만 번지르르하게 뱉는다고 생각했다. 아프지 않으면 청춘이 아닌가. 조금 무던하게, 조금 평범하게 지나가고 있다면 그건 청춘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내가 보낸 10대는 그 사람의 말처럼 대단히 아팠다. 그 사람의 얘기가 싫었는데 그 사람의 말에 아주 딱 맞는 표본이었다. 대단히 아픈 청춘을 지나고 있었으니까. 내 삶 또한 그 얘기와 함께 모순되는 것 같아 싫었다.
내 중학교 때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면 같은 반에서 1학년 학기 초부터 이유 없이 날 유난히 싫어하는 아이가 있었다. 일진이 최고인 중학생 시절의 그 아이는 일진 무리와 어울리는 목청 큰 중학생이었다. 대신 나는 똑같이 목청은 크지만, 그 시절 말하는 빽이 없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그 아이는 어떤 일만 생기면 내게 과민반응했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 잘못이 되어 어깨를 밀쳐지고 정강이를 걷어차여 졌다. 속으로 생각했다. 대체 난 뭘 잘못한 걸까. 이 아이는 날 왜 싫어하는 걸까. 나와 친한 친구들도 이유를 모르겠다고만 했다. 친구들은 날 적당히 방관해줬고 적당히 달래줬다.
중학교 3학년 때에는 뼈 아픈 일도 있었다. 예고 진학이 불가능해졌다. 나는 꽤 노래를 잘했다. 나 스스로 날 치켜세우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잘했다. 교내 밴드부 메인보컬이었고 시 대회나 공연에 나가기도 했었다. 음악이 하고 싶었다. 노래가 부르고 싶었고 그 나이 또래 아이들답게 가수의 꿈을 키웠다. 내 중학교 때 있던 모든 스펙은 하나같이 예고를 가리켰다. 그런데 실기 한 달 전에 성대결절이 왔다. 실기를 앞둔 나에게 너무나 치명적이었다. 방황했다. 예고 진학만을 바라던 내가 꿈이 사라졌다. 수업이 듣기 싫어서 잠만 잤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학교도 가지 않았다. 그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그러다 유예처리 된다며 매일 아침 전화로 날 깨우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멍청하고 나쁜 학생이었지만, 그땐 모든 게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고에 못 갔다. 그냥 집 근처 인문계 고등학교에 갔다. 성대결절 치료도 안 받았다. 노래가 싫어졌으니까.
고등학교에 갔다. 집 근처 5분 거리에 있는 학교. 교복이 예뻤다. 고등학교 때 난 억울하게 누명을 썼었다. 정말 그 시절답고, 그 시절답기에 쓸 수 있는 누명이었다. 여자아이들 사이의 뒷담. 누군가는 나에게 누군가를 욕했고, 내가 말한 한마디의 ‘그랬구나’는 그 뒷담의 동조와 옹호가 되어 날 가해자로 만들었다. 누군가를 욕하던 누군가는 나라는 존재를 악용함으로써 그 누군가와 친한 친구 사이가 된다. 남은 나의 항변을 믿어줄 곳은 없다. 결국 내가 쓴 그 누명 하나가 나에게 있어서 고등학교 3년을 송두리째 뺏어갔다. 내가 토로한 억울함은 억울한 척이 되고, 무반응은 날 뻔뻔한 사람으로 만든다. 누구나 딱 한 가지 일로 날 쉽게 뜯고 험담했다. 소문은 소문으로 멈추는 것이 아닌 더 큰 소문과 더 큰 루머가 된다. 다들 심심했으니 이야깃거리로 날 소모했고, 무료한 일상에서 나에 대한 헛소문을 만드는 것을 재미 삼아 즐겼다.
그 시절 학교에 재미가 없던 나는 일본어 공부하는 것만큼은 꽤 흥미로워했다. 애니메이션이라든지 일본의 무언가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단순하게 언어를 공부하는 게 재밌었다. 그때 쓰던 내 일기장에는 웃기게도 모든 언어가 일본어다. 그렇다고 문법을 맞춰 쓴 일본어 문장은 아니고, 내 억울함을 히라가나로 우리말과 비슷하게 써 놨었다. 보다 보면 웃기다. 내 마음을 감추는 방법이 이거였다니 싶어서. 그러다 일본어를 좀 더 배워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문과를 가려고 했지만, 문과 아이들이 너무 많아 더 모집을 받지 않겠다는 담당 선생님의 이야기 앞에 의도치 않게 이과반이 되었다. 나는 모처럼 새롭게 꾼 꿈을 갑작스레 꾸게 된 만큼 갑작스레 잃었다.
수학과 영어를 대단히 싫어했던 나는 이과 수업이 재미가 없었다. 내가 지금 뭘 하나 싶었고 그 수업 때에는 그냥 잠만 잤다. 우리 반에는 내게 누명을 씌웠던 그 아이들이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나는 위축되어 갔다. 수업시간에도, 어떠한 시간에도 어떻게 하면 나를 더 새롭게 망신 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그 아이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지옥 같은 이 시간을 하염없이 보내는 것이었다. 하염없이 보내다 어느새 고3이 되고, 어느새 생명과학이 좋아진 나는 그쪽 방향으로 진로를 잡게 되었다. 애매한 성적이라 대부분의 선택지를 다른 학과로 선택해야 했지만, 단 한 곳 만큼은 내가 원하는 학과이면서 꽤 높은 대학을 쓸 수 있었다. 이번 기회는 잃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들은 쟤가 무슨 그런 대학을 가겠냐며 비웃었다. 쉬는 시간에 수능특강 문제 풀이를 할 때 한 아이는 스쳐 지나가는 말로 그렇게 한다고 성적이 오르긴 해? 하며 비웃고 지나갔고, 몇 번은 내 책상 위 필기 노트에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녹은 쭈쭈바를 뿌려놓고 갔다. 끈적해진 노트는 쓸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정신력 약한 나는 충분히 맞출 수 있었던 최저등급을 맞추지 못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패배했다.
생각해본 적 없는 기계공학과에 갔고 난 방황했다. 그 아이들이 시작한 일이 마지막까지 날 완벽하게 망쳤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웠고, 절망스러웠고, 삶이 부질없었다. 단 한 번도 내가 원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최악이었고, 최악다웠다. 그 아이들이 시시덕대며 자기들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해 나라는 존재를 반쯤 잊고 살 때, 나는 아직도 19살의 나로 머물러 있었다. 나는 내가 그렇게 사는 게 너무 싫었다. 뒤돌아보니 히라가나로 못 알아보게 쓰던 일기들은 어느 순간 한글로 바뀌어 있었고, 읽어보니 그건 분명 유서였다. 나는 나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유서를 썼다. 죽고 싶고 힘든 날마다 유서를 썼다. 그래. 우울증이었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