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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Jul 23. 2017

나는 대안학교를 졸업했다

새 학기 첫 수업시간처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는 날이면 우리는 나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다. 자기소개는 어렵다. 듣는 사람들이 최대한 흥미로워 하면서도 나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를 가려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이야기 중에서도 내가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중고등학생 시절을 대안학교에서 보냈다.


대안학교[1]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을 소개하면 흔히 돌아오는 반응이 있다. '부모님이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나 봐요. 대단한 결정을 하셨네요.' 아니면 이런 반응도 있었다. '대안학교를 다녔는데 대학에 입학했네요?’


이런 반응들이 대안학교에 대한 몰이해나 편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공교육 바깥에, 말그대로 '대안' 삼아 만든 학교가 모두 대안학교로 명명되기 때문에 대안학교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란 어렵다. 대안학교를 졸업한 나조차 대안학교를 설명하라고 하면 딱 떨어지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요즘은 학교 수가 늘어나고 뉴스 등 미디어에 노출되는 빈도 역시 증가하면서, 제도교육에서 벗어나 대안교육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많은 것 같다.


대안학교를 졸업하여 대학을 다니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대안학교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2]


안녕, 나의 학창시절.


먼저 필자가 왜 대안학교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소개하는 것이 좋겠다. 앞서 소개했던 것처럼 필자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대안학교에서 보냈다. 대안중학교를 입학한 사연은 단순하고 분명하다. 부모님이 결정했다. 부모님이 보기에 내가 독특한 아이였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부모님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를 단 한마디로 설득했다. "교복치마 안 입어도 된다더라." 안 그래도 초등학교 6학년은 그 불편한 옷을 입고 하루 종일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가 없던 차였다. 그렇게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 중 하나가 뚝딱 끝났다.


대안고등학교를 결정한 경위 는 복잡하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닌 모두가 알겠지만, 고등학교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대학을 갈 아이와 가지 않을 아이가 정해지고, 그 선택을 통해 누군가는"실패하고", "성공한다". (망할지도모른다는 공포가 중3 교실을 서성인다. 실제로는 그 누구도 망하지 않지만.) 철 없이 노는 것만 좋아하는 줄만 알았던 친구들이 외고, 예고, 중졸 취업 등 자기 살 길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선택을 더는 미룰 수가 없었다. 


중학교 내내 읽고 쓰는 것만 좋았던 사람이 대학 아닌 다른 선택지를 찾기란 어려웠다. 하지만 빡빡한 내신과 수행평가 사이에서 숨 막히게 살기는 싫었다. 왜 시킨 걸 다 해야 한단 말인가? 그들이 어른이라서? 그게 나한테 필요한지 어떤지는 교사가 아닌 내가 결정하는 것이고, 하고싶지 않으면 안 할 수도 있어야 했다. 외고든 예고든, 일반적인 공립학교든 접한 적이 없었기에 어떤 환경인지 알 수 없어 내가 과연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다. 결국 나는 내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줄 수 있는 대안고등학교를 찾아 부모님을 설득했다.




아주 평범한 대안학교 생활


대안학교 생활은 평범했다. 대안학교라고 하면 산중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부 그렇지는 않다.  내가 다닌 대안학교만해도 '도시형 대안학교'라고 해서 건물의 한 층을 빌려 운영되는 학교들이었다. 남들이 보면 학교라기보다는 학원에 가깝지만, 특별히 다른 외관은 아니었다. 동기들도 유별난 구석이 각각 있었지만 이 땅의 중고생이라면 그 정도 일탈 정도야 기본이라고 생각한다.


단체로 학교 빼먹고 PC방에서 정모 하던 ㅇㅇ학교 동기 분들께 심심한 안부를.


대안학교를 다니면서 좋았던 점은 무엇보다 제약이 적다는 점이었다. 사실 학교를 다니던 중에는 내가 자유로운 학교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잘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름은 대안학교지만 대학을 목표로 하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정규과목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건 다른 학교 학생들과 똑같았다. 주기적으로 모의고사를 봤다. 밤 11시까지 야간자습을 하며 수능공부도 했다. 다만 내신이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과제를 하지 않거나 자습시간에 공부를 하지 않고 딴 짓을 하다가 걸린다고 해서 큰 압박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내신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학생의 자유도는 상승하지만, 우리 학교의 넘치는 자유를 설명할 예시는 더 있다. 첫번째, 우리 학교는 스마트폰을 걷지 않았다. 공강 시간(하루 스케줄을 학생들이 스스로 짜기 때문에 공강도 있었다.)에 뭘 할 지는 순전히 학생들의 몫이고, 스마트폰 사용도 선택지 중에 있었다. 다만 선생님께 ‘제안’은 받았다. ‘스마트폰이계속 신경 쓰이면 선생님이 관리를 해 줄 수도 있다. 필요할 때 이용해라’라는 내용의 제안이었다. 내 경우 처음에는 필요 없다고,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며 거절했지만, 이후 자진해서 선생님의 연구실 서랍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어떤 동기는 자신의 기기를 연구실의 벽면(!)에 테이프로 붙여, 한 학기 내내 전시하기도 했다. 내가 졸업하고도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스마트폰을 걷고 관리를 한다는데, 그것 역시 교사들의 결정이 아닌 학생들의 결정이었다. 쉬는 시간마다 핸드폰을 쥐고 있자니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골자였다.


 그 밖에도 공립학교에서 대체로 금기시하는 염색이나 화장 역시 학생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나는 머리를 샛노랗게 염색하고 한 학기를 보낸 적이 있다. 화장은 답답했고 귀찮았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하지 않을 수’ 있었던 환경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아리는 학생들이 직접 만들고 스케줄을 구성해 운영했다. (나의 경우 만화동아리라고 해서, 2시간 내내 만화책을 읽는 동아리를 기획했다가 한 학기 만에 해산했다. 뜨개질 동아리라는 이름으로 다른 동아리 활동하는 걸 구경하며 뜨개질을 하기도 했는데, 목도리 한 개도 제대로 못 떴다.) 수학여행 목적지와 여행 중 식사할 식당, 숙소, 게임 모두 학생들이 선택하고 투표하여 결정했다. (지도에 다트 던져서 수학여행지 정하는 학교, 도시괴담 같지만 실제로 있다.) 학기말 축제, 입학식, 졸업식, 운동회, 모든 프로그램이 학생들 손에서 탄생했다. (덕분에 우리 학교 입학식과 졸업식은 늦게 끝나기로 악명이 높다.)


이 일들을 학생들이 어떻게 다 해낼까 싶지만, 교사들의 기본적인 지도만 있어도 가능했다.




자유의 다른 이름은 불안


여기까지 설명하면 많은 친구들은 나에게 ‘부럽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괴로웠던 고등학생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새벽 6시에 일어나 등교하고 공강 한 번 없이 수업을 들으며, 밤 10시까지 야자가 끝난 뒤에도 새벽까지 독서실을 가거나 학원을 갔던, 고등학생 시절이라고 쓰고 수감 시절이라고 읽는 당시의 이야기를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가 아닌 제도교육 내 학교를 선택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불안’이다. 대안학교 재학시절 누린 자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돌아온다. 이 불편한 고민은 선택의 기로에 선 학생들뿐만 아니라 대안학교를 실제 다니고 있는 학생과 학부모를 끝까지 괴롭힌다. 


자습을 할 지 안 할 지 여부는 학생의 선택에 달려있다. 스마트폰을 낼 지 내지 않을지 여부나, 동아리를 뭘 할 지, 수학여행을 어디로 갈지, 공강 시간에 공부를 할지 아니면 책을 읽을지 음악을 들을지, 모두 학생의 자유다. 그렇다면 그 선택으로 인해 돌아오는 모든 결과는 학생이 책임져야 한다. 대안학교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는 내내 이 엄중한 법칙에 대해 깨우친다. 자유의 다른 이름은 불안이며, 자유에 대해 모든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안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이 다른 학생보다 자유롭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들이 누리는 자유는 한시적이며 또한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대안학교는 학생이 수능 1등급을 맞도록 책임지는 학원이 아니다. 학생이 반드시 옳은 삶을 찾아낼 수 있게 하는 철학원도 아니다. 다만 불편한 제도교육 바깥에 다른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길을 보여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필자는 대안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것을 후회한 적이 없다. 부족했던 나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와 다른 사람과 고민하고 소통하며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대학 진학이라는 좋은 결과가 당시의 기억을 미화한 것은 아닐까 고민한다. 원했던 결과에 못 미치는 대학에 합격했다면, 그 때도 나는 대안학교를 진학한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을까? 대안학교 생활이 즐거웠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추천하지 않는 이유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생각은 단순히 대안학교냐 공립학교냐 사이의 결정에서만 머물지 않고, 이 사회의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는 청소년 모두가 하고 있는 고민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혹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을까. 불안 속에서 옳은 선택을 하길 빈다.




[1] 대안학교란 공교육(제도교육)의 문제점을보완하고자 설립된 모든 학교를 의미한다. 대안학교는 교육청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학교와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로 분류할 수 있다. 필자는 인가를 받지 않은 학교를 졸업하여 각각 중졸, 고졸 검정고시를 통과 후 대학에 입학했다.


[2] 대안학교마다 추구하는 바에 따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이 글이 모든 대안학교를 설명하지는 못한다는 점 미리 적는다.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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