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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드캠퍼스 Aug 01. 2017

우리가 남이가? 네, 남이랍니다

가깝지만 낯선 ‘가족’ 이야기

나는 모태신앙이다. 어머니 뱃속에 있었을 시절부터 종교가 정해져 있었다는 의미다.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르던 나이부터 성당을 다녔다. 우리 동네는 신도시라 내가 어렸을 시절에는 제대로 된 성당도 없었다. 덕분에 임시 건물 안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담배 냄새 나는 신부님과 포도 캔디 냄새가 나서 침이 고였던 영성체, 솔 태우는 냄새, 목덜미를 간질이던 면사포 같은 것들이 기억난다. 나는 강당 앞자리에서 큰 소리로 성가를 부르길 좋아했다. 아기 시절부터 성당을 다녔기 때문에 악보를 보지 않아도 가사를 외워 부를 수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이 전부 그랬다.


하지만 나는 미사 드리는 일이 싫었다. 갑자기 싫어진 것은 아니고, 부모가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가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강론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싫어한다. 어릴 적 부모가 쥐어준 봉헌금 천 원으로는 간식을 사먹었다. 미사가 끝나고 나서는 주일학교 선생이던 어머니 몰래 도망가기 위해 탈주계획을 세웠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를 진학할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는 자습을 핑계로 성당을 나가길 그만두었다. 독실한 신자인 부모는 의아해했다. “왜 성당에 가지 않니?” 부모가 물으면, 10대 시절에는 “신을 믿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교리와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는 신을 믿는 부모와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우리가 남이가? 네, 남이랍니다


어린 시절 우리는 하나의 주체라기보다 부모와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자녀가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구와 더 닮았는지는 주변인들의 중요한 이야깃거리다. 그리고 어린 자녀는 어디를 가든 부모의 아들, 딸로서 호명된다. 부모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는 이름 석 자보다 ‘ㅇㅇ엄마’, ‘ㅇㅇ아빠’라고 더 자주 불린다. 이렇게 어딜 가든 세트로 불리다 보니 부모와 자녀가 서로 분리를 잘 못한다.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바가 자녀의 소망인 것처럼 착각하고 요구한다. 자녀는 부모가 요구하는 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인 줄 착각하고 성취하여 칭찬받고 싶어 한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자녀를 보호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부모와 자녀의 동일화가 가능하다지만, 주체적 자아가 형성되는 청소년 시기까지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자녀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문제에 대해 부모가 간섭하거나 대타 행세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애 취급’이다. 예컨대, 자녀가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저녁 자습을 신청 받는다고 한다.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들은 자유롭게 자습을 신청해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학생들은 공부를 더 해야 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시켜서’ 자습을 신청한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녀가 자습이 끝날 시간에 맞춰 자가용을 몰고 데리러 온다.



이런 문제는 청소년 시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대학 진학을 하고, 졸업하여 사회적인 독립을 한 이후의 성인 시기에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원하는 과에 진학했다가 후회하고 있다는 친구들의 증언만 봐도 그렇다. 집에만 있으면 보기 답답하다는 이유로 시동을 거는 부모와 서로 부딪히는 일이 많아 자취하고 싶다는 친구들도 많이 봤다. 부모가 무슨 권한이라도 가지고 있는지, 밤 10시만 넘으면 부모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친구들은 또 어떤가. 마흔, 쉰이 넘은 자녀가 아직도 애인 줄 알고 24시간 내내 CCTV인 양 감시하며 닦달하는 TV 프로그램도 성행한다. 나이 쉰 넘어 자기 앞가림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성인에게 결혼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며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아이 취급을 한다.


부모는 “너를 위해서야”라고 항변하겠지만, 변명이다.

내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옆집 아줌마와 아저씨, 그리고 옆집 아이들


10대 시절 부모가 우스갯소리로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있다. 학부모 모임에서 나온 농담이라는데, 자녀가 속을 썩여서 화가 날 땐 자녀를 ‘옆집 애’라고 생각하면 된단다. 어차피 자녀와 부모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으니, 부모가 자녀 일로 고민해봐야 서로 불편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무책임한 방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가족 간에 반드시 필요하다. 자녀를 ‘옆집 애’라고 정의하는 순간, 부모는 자녀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십 몇 년을 동고동락한, 내가 보호하고 양육해야 하는 나의 아이가 아닌, 낯선 누군가로 말이다.


자녀 역시 부모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옆집 딸내미’라면, 내 부모는 ‘옆집 아저씨’, ‘옆집 아줌마’다. 이 ‘옆집 부부’는 파란만장한 십대를 보냈다. 각각 이십대와 삼십대가 되어 결혼이라는 사회적 의식을 함께 치르고 나서도 구조적 가난은 그들을 온갖 고생 속에 몰아넣었다. 그들의 젊은 날은 사회적 독립을 준비하는 데, 어린 아들 딸을 건사하는 데 쓰였다. 그 외에도 내가 모르는 이 ‘옆집 부부’의 지난 역사가 그들 각각을 구성하고 있다. 



‘나’와 가족은 서로 다른 사람이다. 부모가 특정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자녀 역시 그 종교를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부모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때로는 부모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존재를 당연하게 여기고 때로는 무관심했던 가족이 어떤 얼굴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개인인지 살펴보자. 여태껏 ‘우리’이고 ‘남’이 아니었던 가족 구성원들을 가족 바깥에서 조망해보자. 그들 각각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들여다본다면, 생각보다 낯선 사람들이 보일 것이다.


여러분의 옆집 아저씨, 옆집 아줌마는 어떤 사람들인가?




본 칼럼은 ©TENDOM Inc.과 한국청소년재단이 함께 운영하는 '애드캠퍼스 온라인 칼럼멘토단' 소속 대학생 멘토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위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은 글입니다. 글의 내용은 운영기관의 공식의견이 아니며, 일부 내용은 운영기관의 의견과 다를 수도 있음을 밝힙니다. 칼럼은 출처를 밝히는 한 자유롭게 스크랩 및 공유가 가능합니다. 다만 게재내용의 상업적 재배포는 금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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