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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빛소금 Mar 04. 2020

언제 들어도 좋은 말

이석원 이야기 산문집 / 그책 펴냄


친밀감
 
좋아하는 것보단
싫어하는  비슷할 
더욱 강하게 드는 .
 
예쁜 말은 예쁜 마음에서 나오고
예쁜 마음은 유순한 생활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피차 평탄하고 순한 시간들을
보내온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 예의를 갖춘 말과 몸가짐으로


공감 어린 시간을 보냈다.
 
그녀가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그래서 듣기 싫었던 말은
여자라서 그래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심지어 사랑까지도
 사람 고유의 판단과 개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어떤 현상의 하나로 해석되거나
혹은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비롯된 것으로 치부될 
 
다시 말해
그건  애라서 그래 아니라
어려서 그래.

여자라 그렇지 .
 같은 말들이 존재를 외롭게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힘이 들까.







기분이 살짝 밝아지는 것을 느끼며 차의 운전석에 올라 처음 타보는 작고 귀여운 녀석을 몰고는 건물을 벗어나 광화문 대로로 빠져 나갔다. 시간은 저녁 여섯시 삼십분. 우선 저녁을 먹어야 해서 어디로 갈까 생각하려 애쓰고 있는데 여자가 라디오를 틀었다.
 
이런 이런 큰일이다 너를 마음에 둔 게
 
순간, 나는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가회동 방면으로 홀린 듯 핸들을 틀었다.







참 신기하죠.
 
내 고민엔 갈피를 못 잡고 허우적대면서
남의 고민을 들으면 해답이 너무도 선명히 보이고
내 집 대청소를 할 땐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남이 집 정리하는 거 도와주러 가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정리를 잘하냐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에요.

그러니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고
가르쳐  수도 없으며
가르치려 든다면 오히려 웃길 듯한
하여
결국엔 스스로 터득할 수밖엔 없는
스스로를 사랑하는 .
오롯이  자신과 마주 보는 .
자기 자신과 가능한 불화 없이 함께  살아가는 .








이 바보 같은 놈아.
기분이 나쁘면 나쁘다고
싫으면 싫다고
왜 말을 못해.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에게
아닌 걸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편해진 관계의 엄연한 공범이라고.






사랑이란 결국 상대와는 상관없는 나 자신의 문제이기에, 이렇게 엇갈릴 수밖에 없으며 사랑의 그런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불완전성이야말로 사랑을 영원하게 해주는 요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람들로 꽉 찬 지하철에 짐짝처럼 실려 강남역으로 갔다. 처음 소개팅을 하던 날부터 지금껏 나는 여자한테 내 차를 보여준 적이 없다. 애초 내가 무엇을 타든 관심도 없을 여자 앞에서 나 혼자 자격지심에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별로 좋지 않은 기분으로 교보에 들어서니 연말이라 그런지 서점 안도 방금 타고 온 지하철만큼이나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자를 보라. 공간을 새카맣게 메운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어떤 여자가, 그것도 그토록 미워하고 서운해 하던 사람이 자기를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을, 그 눈엔 그 사람만 보이기라도 하는 양 한 번에 알아보는 이 광경을.
 
아, 내 사랑.







나는 문득 내가 그녀의 연락을 기다리는 순간들이 뜸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날은 아예 하루 종일 그녀 생각을 안 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영원히 저 울리지 않는 휴대폰만 쳐다보게 되진 않을까 두려웠었는데. 이래서 사람은 일이 있어야 하는구나. 뭔가 다른 신경 쓸 일이 있어야 잊는 것도 수월하겠구나. 참 안 로맨틱하고 인정하기도 싫은 너무도 현실적인 깨달음이었다.





행복
 
행복해서 삶이 소중한 게 아니라
삶이 소중한 것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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