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나이들 것인가.
어느 사이에 안경을 끼면 가까이 있는 작은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종이를 멀찌감치 들기에는 그 모습이 영락없는 노인 같은 모습에 안경을 슬그머니 벗고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거리에서 다시 글을 읽는다. 아무도 보는 이 없지만 이런 내 모습에 스스로 고소를 짓는다.
아이를 키워야 했던 이십 대 삼십 대에는 내 모습보다는 아이들을 보는 것으로 하루를 보냈다. 잘 먹어서 키와 몸이 자라나고 있는지, 불편한 점이나 염려되는 점 없이 마음이 건강하게 자라나고 있는지 등 집의 아이들과 학교의 아이들을 보느라 정작 나는 얼마나 커가고 있는지, 잘 살고 있는지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더 이상 아이들이 엄마의 손길이 덜 필요할 때가 되자 이제야 스스로에게 손길을 더한다.
처음에는 나를 관찰하는 일이 낯설고 어색했다. 그럴 것이 외모에 자신감도 없었고 매력 있는 미소도 지니지 못한 나의 모습을 거울로도 자주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보다 나이 든 언니들이 ‘내 행복을 찾는 게 먼저다.’ ‘나부터 잘 돌볼 줄 알아야 한다.’ ‘더 나이 들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은 해보자.’라는 말을 하기에 나를 생각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나갔다. 그런데 철없이 나이 든 나는 자꾸 불평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왜 벌써 눈이 안 보이는 거야? 다초점 렌즈를 맞추러 가야 하나? ’
‘무릎 위에 살까지 축 늘어지다니. 게다가 아랫배는 왜 이렇게 볼록 나온 거야.’
‘흰머리 좀 봐. 계속 염색하러 가는 건 귀찮은데, 아휴 스트레스 때문인가.’
‘엄마가 손도 늙는다고 말했는데. 이것 봐. 손도 늙었네. 잔주름 좀 봐.’
한 개 한 개 관찰할 때마다 이렇게 몸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나를 볼수록 나이 들어가는 육신이 그렇게 야속할 수 없었다. 그럴수록 다른 이에게 젊게 보이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젊어 보인다고 칭찬해 주면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또, 젊은 사람들을 보면 속으로 부러워하고 시샘하는 마음까지 들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나이만 먹고 마음은 미숙하기만 한 철없는 어른이 아닌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나는 멋진 어른이고 싶고, 현명한 노인이 되고 싶었다. 노년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쓸모없어지는 게 아니라 노년이 되어도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하는 지인이 되고 싶었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었다. 친구도 가족도 점점 옅어져 가는 삶에서 끝까지 ‘나’를 책임지고 함께 가야 하는 내가 나를 사랑해 주어야 했다.
파커 J 파머는 나이 듦에 관한 생각을 나눠준 저서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쇠퇴와 무기력이 아닌 발견과 참여의 통로로 나이 듦의 프레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
멀티태스킹 능력을 잃어버렸으나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하는 기쁨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생각의 속도는 좀 더더 졌으나 경험이 생각을 거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으며,
크고 복잡한 프로젝트에 더 이상 관여하지 못하지만 단순한 것들의 사랑스러움에 더 눈길을 주게 되었다.
친구와의 대화, 숲 속 산책, 일출과 일몰, 달콤한 밤잠 같은 것들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감정은 삶의 선물에 대한 감사다. - 모든 것의 가장자리에서
그러면서 파커 J는 노년의 인생은 공공선을 위해 더 큰 위험부담을 감수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이들 수만 있다면 내 전 재산을 바꾸자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야 조금이라도 권위를 부리거나 독단으로 목소리 큰 사람을 꼰대라고 하던데 모두가 파머처럼 나이들 수 있다면 길가는 모든 어르신들을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인사할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잠깐 생각해 본다.
어찌 되었든 나는 나와의 대화, 나와의 산책, 나만의 즐거운 놀이를 찾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아직도 하이킹을 하고 글을 쓰며 장엄한 일몰을 즐기면서 사는 파커 J처럼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나씩 못하게 되는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오히려 여유 있어지고 사색할 수 있고 포용하게 되는 삶으로 나이를 바라보고자 한다.
법구경에는 한단지몽의 예화가 나온다.
당나라 현종 때 노생이라는 가난한 선비가 있었다. 노생은 한단으로 가는 길에 한 주막에서 도사 여옹을 만나 자신의 인생을 한탄하는 푸념을 한다. 여옹은 노생에게 자신의 베개를 주고 밥을 짓는 동안 잠시 잠을 청하라고 한다.
노생은 과거에 급제하고 순조롭게 승진하여 재상이 되었다. 10년간 명재상으로 이름을 높였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리게 되어 변방으로 유배된다. 그곳에서 노생은 자신의 지난 과오를 돌이키게 되고 수년 후 다시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되어 편안하게 노후를 지내며 생을 마친다. 노생이 기지개를 켜며 깨어 보니 그것은 아직 밥의 뜸이 들지 않을 정도의 짧은 꿈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옹은 “인생은 다 그런 것이라네.”라고 말한다.
그렇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생이 영원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오랜 세월 나이를 먹은 지구적인 차원에서 보면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짧은 기간일까!
그리고 그 오늘은 또 얼마나 찰나의 순간일까!
그러니 젊음과 나이 듦이라는 단순한 비교로 생을 분절할 것이 아니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의 내가 만들어 갈 나의 시간에서 내 영혼들이 알알이 영글어 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 모든 찰나의 ‘나’들이 감사하는 나이기를, 사랑하는 나이기를 응원한다. 비록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영 못마땅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