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에 나도 그를 써봐야지.
나의 아버지, 빨치산이 아닌, 빨갱이도 아닌, 나의 아버지.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다. 더 정확히는 마주하기 두렵다. 직면하고 싶지 않다.
그가 살아온 세계로 들어가 무엇을 보았는지 살펴보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며 그로 인한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알게 되는 일을 나는 할 수 있을까?
아버지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도 온통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쓸 자신이 없다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내 부모를 보는 일은 저 어둑한 심연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보다 더 하기 싫은 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의 세계로부터 탄생했기에 나의 한 부분은 그를 닮아 있다. 그래서 그렇다. 벗어나지 못하고 외면하지 못하기에 제3의 눈으로 판단할 수가 없다. 마음에 드는 부분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면적이 더 눈에 띈다. 질척이는 감정에 푹푹 빠져 어딘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여기며 해가 지도록 헤매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정지아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지구 반대편으로 푹 꺼지는 듯한 마음으로 글을 썼을 것 같고, 낙하산도 없이 고공에서 추락하는 마음으로 쓰지 않았을까 해서.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오로지 작은 뗏목에 몸을 뉘인 채 이리 흔들 저리 흔들할 것 같아서.
만약 내가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한다면 그러한 마음이 들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했다.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거부하는 이유를 오만하고 이기적이며 실수투성이의 부끄러운 자신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한다.
젊은 날의 그녀는 빨치산인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비난했고, 무례히 행했으며, 이해하지 못했기에 그렇다. 그래서 글을 썼다. 기나긴 터널을 마침내 통과하고서야 온전히 한 점을 찍었다. 드디어 빨치산의 딸로 살았던 자신과 아버지를 끝내 화해시키고 용서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사회주의자가 누구인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민주주의 체제 아래 평생을 살아왔기에 내가 아는 것이 진리요, 겪어온 삶이 세상 전부인 줄 알고 살아왔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그러니까 현실세계에서 빨갱이였기에 징역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와 그의 딸로 살아온 작가의 삶이 어떠했겠다는 것은 감히 짐작도 되지 않는다.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고아, 노숙자 등 사회의 약자에 속하겠구나 싶다.
사실은 사회주의자가 꿈꾸는 세상은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이거나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 모두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그저 인간적인 세상일 뿐이었는데 말이다. 사회주의자의 사상이 왜 약자로서의 편견과 불편을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국민이 주인이라고 하는 말뿐인 민주주의는 오히려 악덕하고 냉정한 국가다.
사상과 신념 따위는 잘 모르겠다. 빨치산으로 산 그의 삶 중 어디까지가 사상이고, 신념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사람의 도리를 똑똑히 해두었던 그는 사상과 신념보다 더 큰 인간다움이 있었다.
“오죽하면 그랬겠어.” 말하며 만인을 품을 것만 같았던 만만한 아버지.
그러나 황천으로 가는 길은 외롭지 않았고 그의 죽음을 진실되게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며 드디어 그녀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우리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오셨을까.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날이 오기는 할까.
나는 아버지에 대한 마음이 복잡하다. 젊지 않은 나이까지 엄마에게 상처를 주었던 일.
우리 힘들 때 보태준 적 하나 없던 큰아버지 고모들에게 끝내 뭐라도 주고 마는 답답한 선택들. 남들에게 하는 것보다도 친절하지 않았던 아버지 노릇. 몸 고생하면서까지 꺾이지 않는 고집불통 농사일 등 무엇하나 속 편한 게 없다. 가난한 농부의 6남매 자식 중 유일하게 제대로 지 할 일을 하며 사는 아버지. 언젠가 그 삶을 이해할 날이 오기는 오겠지 했는데 책을 읽으며 조금 알 것도 싶다.
아버지가 이룩한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 날이 오겠지 라는 마음.
넉넉한 여유를 갖고 그날이 오기를 기다릴 수 있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