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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괜찮은 죽음 Sep 05. 2024

다시는 없을 열여덟

너에게 쓰는 편지 

일 년 중 딱 하루. 그 새벽의 나로 돌아가는 날이다. 

만삭의 아내를 집에 두고 늦은 밤까지 회식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원망하며 홀로 운동장을 걸었었다. 

그리곤 새벽부터 사르르 배가 아파왔다. 책으로만 경험한 진통의 시작이었다. 

그리곤 만 하루의 진통 끝 다음 날 그 새벽에 첫 아이를 만났다. 무통주사도 없이 아픔을 감내하며 엄마가 되던 날이었다. 

세상의 모든 엄마는 아이를 낳았다는 것만으로 칭송받아야 마땅할 위대한 존재로 보이던 날. 

그리고 보잘것없는 내가 건강하게 딸아이를 낳았다는 것만으로 기쁨으로 가득했던 날.

하지만 이 연약한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보살펴야 할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날. 

벌써 18년 전의 일이었다. 


다시는 없을 열여덟 번째 딸아이의 생일날. 

제법 어두워서 풀벌레 소리 진하게 울리는데도 이 녀석은 전화 한 통 없고, 

식구들 없는 텅 빈 식탁에 오도카니 앉아 그날을 떠올려본다. 


잘 키우겠노라고.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했었는데. 

잘해왔는지 모르겠다. 

그냥 고마웠다. 

내 딸로 태어나줘서. 

꿈을 가진 예쁜 아이로 자라나 줘서.

착하고 반듯하고 배려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는 듯해서 

감사하다. 




생일 축하해. 우리 딸 

즐겁게 놀고 있니? 

보이지 않아도 친구들과 얼마나 많이 웃고 있을지 눈에 보이네.

엄마는 늘 네가 자랑스러웠어. 

네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과 열정을 쏟는 모습이 얼마나 듬직한지. 

힘들어도 투정 부리지 않고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엄마는 네가 꼭 좋은 음악가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행복을 맛보길 바라.


하지만 딸,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알고 있지? 

네가 가려는 길에 최선을 다해 끝까지 갔는데 

만약 그 길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 

아마 너의 길은 그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될 테니까. 


살면서 만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더 좋은 결과를 늘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을 테지만, 

어떠한 길에서도 우리는 감사하며 걸을 수 있어. 

감사하며 걷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생각하자. 

바람도 느끼고, 새소리도 듣고, 꽃도 좀 보고, 

그리고 너와 함께 걷는 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비록 그 길이 좀 힘들어도 괜찮지 않을까? 


엄마는 인생의 2막을 준비하기 위한 초입을 걷는 중이야. 

교사로서 스무 해를 살았는데 네가 본 대로 엄청 열심히 살았지.

이제는 에너지를 조금 아껴서 나를 위한 인생길을 개척하려고 해. 

아직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캄캄한 길이어서 두려움도 있지만

작은 별빛 하나 의지해서 걷는 중이야. 


너도 성인이 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네. 

너의 삶은 어떻게 펼쳐질까? 

너를 보는 엄마는 또 얼마나 뿌듯할까? 

생각만 해도 좋다. 


묵묵히 뒤에서 바라보는 엄마가 될게. 

지치고 힘들면 언제든 안길 수 있는 거리에 있을게. 

 비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해. 

다만, 봄에는 민들레 홀씨를 불어주고, 여름에는 매미의 울음소리처럼 

가을에는 고소한 곡식냄새 풍기며, 겨울에는 차가운 두 손 녹이는 핫팩처럼 

너의 곁에 있을 거야. 


사랑한다. 내 딸. 

너의 열여덟 번째 생일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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