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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희 Jun 29. 2021

기댈 수 있는 상대를 만나고 싶다는 착각

혼자여도 잘 살 수 있을 때



 어리고 미숙했던 시절, 누군가 이상형을 물을 때면 항상 했던 얘기가 있습니다. '든든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구요. 내가 못하는 것들을 척척 해내는 모습이 멋져 보였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상대에게 나도 모르게 마음이 훅 가버리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난 누군가와의 관계가 지속될수록 부작용도 존재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혼자 할 수 있는 게 줄어들었죠.

이것도 그에게 부탁하고,

저것도 그에게 부탁하며,

 자연히 의존적인 관계가 되었습니다. 간단한 일 하나도 혼자 해내지 못했고, 웬만한 건 다 그에게 묻고, 부탁하고 의지했습니다. 무언가를 하면서 막히거나,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혼자 해결하려는 생각보다 그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혼자 해보려는 생각은 일단 뒤로 미루고 '이게 안되는데 어떡해~?'라며 공을 넘기는 거죠. 사실 스스로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단 할 수 없다는 전제를 깔아 뒀던 것 같습니다.


 내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늘 한발 뒤로 물러서 있었고, 그저 그가 제시해준 해결책에 맞춰서 그것이 유일한 정답인 냥 행동했을 뿐이었죠. 전자기기를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무슨 옷을 살지 등의 사소한 문제부터 어떤 분야의 진로로 정하면 좋을지 등의 중대한 문제까지도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가 괜찮다면 마치 내가 올바른 선택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그가 아니라 하면 다시 결정을 되짚어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점점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되어 갔죠. 


 그렇게 시작되었던 연애의 끝은 늘 힘들었습니다. 후유증이 너무 컸죠. 내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실행해나가야만 하는 상황이 힘겨웠습니다. 한동안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 때리기도 했구요. 그간 성숙하고 건강한 연애를 하지 못했다는 증거였죠. 어떤 문제 상황에 부딪힐 때면 자연스럽게 그가 떠올랐고, 그였다면 내게 어떤 조언을 해주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게 사랑하는 연인이기도 했지만 내 삶의 대리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때의 나는 사랑을 한 걸까, 의지를 한 걸까?



 당시 저는 지나치게 의존적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의지하고 기대는 것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에서 그의 도움을 받으려 했었죠. 지금 생각해보니 일종의 ‘의존적 성격장애’에 가까웠던 것 같습니다. 의존성 성격장애란, '주변 사람들로부터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가 지나쳐 자신의 의존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매달리고, 의존 욕구가 거절될까 봐 무서워 다른 사람이 무리한 요구를 해도 순종적으로 응하는 인격장애'를 말합니다(글 하단의 '진단기준' 참조).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리 불안이나 불안정한 대인 관계를 흔히 보이곤 하죠. 물론 경중의 차이가 있겠지만 늘 내 옆자리가 채워져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은 의존성 성격장애를 겪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저는 극단적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불안을 겪지는 않았지만, 누군가와 연인 사이가 되었을 때 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습니다.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조언을 들은 후에 결정을 내렸고, 결과적으로 그에게 내 인생의 대부분을 맡긴 셈이었습니다. 나를 지지해주고 돌봐주던 그 사람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서둘러 찾았죠. 당연히 건강한 관계 일리 만무했습니다. 


 물론 기대고 의지하는 게 항상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내가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당연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하구요.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건 내가 혼자 할 수 있음에도 습관적으로 타인에게 의존하는 행동입니다. 그랬을 때의 단점은 그 대상이 없어졌을 때 홀로 서는 게 힘들어진다는 겁니다. 그가 천년만년 내 옆에 있어주면 좋지만 혹 헤어지거나 했을 때의 빈자리가 상당히 크게 느껴지죠. 그 빈자리를 견디다 못해 일단 누군가라도 좋으니 만나보자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은 혼자서 이것저것 잘합니다. 비빌 언덕이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뛰어듭니다. 웬만한 건 혼자 다 해낼 수 있죠. 지금까지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에게 지나치게 의존했었던 겁니다. 혼자가 되고 보니,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나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그를 빼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생각조차 하기가 힘들었지만, 모든 걸 해내는 성공 경험이 축적되다 보니 혼자여도 잘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형도 바뀌었습니다. 예전에는 내가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슈퍼맨처럼 나타나서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상형이었죠. 어려움이 닥쳤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랄까. 그래서인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경험이 풍부한 상대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내 문제는 기본적으로 내가 해결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 지금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서로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어려움이 있거나 힘에 부칠 때 옆에서 도와줄 수는 있겠으나 기본적으로 그와 나, 주체적으로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어찌 보면 이전에 '외로워서 연애하고 싶다는 착각'이라는 글에서 일부 언급했던 외로움의 성격과 비슷하기도 합니다. 외로움에 짓눌려 누군가를 만나는 것보다 혼자만의 고독과 외로움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듯이,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나만의 자립심을 키워 웬만한 건 스스로 해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혹시 지금 연인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다면 자문해보기를 권합니다. 

'그 사람이 없이도 혼자 설 수 있는가. 잘 살 수 있는가.' 

일방적으로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가 힘들거든요. 또, 지속된다 한들 갑작스러운 상실과 맞닥뜨렸을 때 그 후유증이 매우 크구요. 내가 혼자여도 잘 살 수 있을 때 비로소, 둘이 되어도 더 행복할 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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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댈 수 있는 상대를 만나고 싶으신가요?

그전에 내면을 먼저 단단히 다지고 스스로를 바로 세워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큰 내 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 미국 정신 의학회의 정신장애 진단통계 편람(DSM-V)에 따른 진단 기준 -


1)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조언이나 확신이 없이는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함

2) 자신의 생활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어 줄 다른 사람이 필요함

3) 주변 사람들의 지지나 동의를 잃는 것이 두려워 반대 의사를 표현하지 못함

4) 자신의 능력이나 판단에 대해 확신이 없어 어떤 일을 스스로 시작하는데 어려움이 있음

5) 불쾌한 일일지라도 다른 사람의 지지를 얻기 위해 그 일에 자원하기까지 함

6) 스스로 자신을 돌볼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에 혼자 있으면 불편하고 무력해짐

7) 자신을 돌봐주고 지지해주던 사람과 헤어지면 그러한 지지, 돌봄을 받기 위해 급히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함

8) 항상 스스로를 돌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집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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