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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희 Nov 11. 2024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질까요?

<가치관의 탄생>


 시대에 따라 가치관이 달라질까요?


 이언 모리스의 <가치관의 탄생>을 읽으면 이 질문에 작은 힌트나마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사실 책을 읽기 전에 가치관이란 고정 불변인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읽고 난 뒤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이 내일은 어리석은 것으로 평가될지 모른다며, 도덕적 행동의 선악 개념은 누가 판단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수렵채집자, 농부, 화석연료 이용자, 모두 도덕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거죠.

 

 책의 구조는 굉장히 독특합니다. 처음 저자가 주장을 펼치고, 그에 대한 학자들의 논평이 이어지며, 다시 조목조목 반박하는 저자의 반론으로 끝을 맺지요. 반론을 펼치는 쳅터 제목이 '나의 견해는 언제나 옳다'이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요. 자신에 대한 주장에 얼마나 확신이 있어야 그렇게 자신감 어린 태도가 나올 수 있는 건지... 본인 생각과 판단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수렵 채집인] 

수렵 채집인들은 우연히 좋은 것을 발견했을 때 남과 나누지 않는 것을 '건방진' 것만큼이나 죄악시한다. …… 지구상에 존재했던 거의 모든 수렵채집인에게는 공유 강요를 행하고 또 거기에 응할 이롭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 재산권은 강하게 존재하지만 물질적 위계가 형성되는 경우는 드물다. …… 수렵채집 집단의 부의 불평등 정도가 이처럼 낮은 이유는 명백하다. 대개의 수렵채집인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산다. 떠돌이 생활은 물질적 부의 축적을 어렵게 하고 나아가 무가치하게 만든다. 첫째, 소유물을 질질 끌고 산과 들판을 다니며 사냥과 채집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둘째, 몇 주마다 버려야 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소유욕도 생기지 않는다. 


 소유물이 방해가 되므로 자연스레 꼭 필요한 물건만 챙기게 되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수렵 채집인은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는 가치관을 지니므로, 그 시대의 부의 불평등은 낮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냥과 채집을 하며 계속해서 이동하는 것을 고려할 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대의 물질 만능주의를 생각해 볼 때, 과연 지금 수렵 채집의 시대에 살고 있다면, 어떻게 달라졌을까, 부를 숭상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 않았을까, 많은 생각을 하게끔 하는 챕터였습니다.



[농경민]

일례로 농경 사회는 계급의 상징에 몹시 집착했다. 법으로 정의된 품계로 스스로를 세분화하고, 각각의 지위에 고유한 휘장을 부여했다.
노동 생산성 증대가 관건이 되면서 남자의 강한 상체 근력이 농사일에 중요해졌고, 사람들은 점차 바깥일을 남자의 일로 인식하게 되었다. …… 농부의 아내는 여성 수렵채집인보다 아이를 훨씬 많이 낳았다. …… 육아와 농작을 병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인구 변화와 노동 패턴의 변화가 공모해서 결국 남녀의 영역을 바깥일과 집안일로 분리했다. 


 정착해서 사는 농경민은 평등보다 위계를 중시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성도 이전보다 아이를 훨씬 많이 낳고, 남녀의 영역도 달라졌지요. 성차별에 대한 개념도 이 시기에 발로한 것이 아닐까요? 농경 시대에 가장 중요한 가치가 '노동 생산성 증대'이기에, 그에 따라 남성의 체력 중시 등 가부장적인 사회로 변모하는 것에도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석연료 이용자]

경제발전 수준이 낮을수록 사람들이 전통적 가치관을 갖는 경향이 짙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비중이 커지면 사람들의 가치관이 일반적으로 합리주의와 세속주의, 자기표현 쪽으로 이동한다.
화석연료 등장 이전의 여자들은 성년의 대부분을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보내야 했다. 그러다 유아생존율이 높아져 그럴 필요가 없어지자 부모들은 자녀를 최대한 많이 낳는 것보다 적게 낳아서 보육과 교육에 많이 투자하는 쪽을 택했다.
화석연료 덕분에 세상이 에너지로 넘쳐나자 사람들은 전례 없던 에너지 풍요의 시대를 조직화할 방법으로 크게 두 가지 경로를 택했다고 말했다. 나는 두 경로를 자유주의와 반자유주의로 불렀다.


 윗 구절의 자유주의는 자본주의를 말하며, 반자유주의는 사회주의, 파시즘을 의미합니다. 에너지 풍요의 시대를 조직화할 방법으로 두 가지 경로를 택했다는 관점이 신선했습니다. 자유롭게 풍요 그대로를 즐기는 자유주의와, 중앙에서 자유를 통제하는 반자유주의가, 냉전 시대의 발원이 되었을 거란 생각도 들고요.

 수렵채집시대와 농경시대를 거쳐, 전례 없던 에너지 풍요의 시대를 경험하는 시기인 화석연료 시대에는 합리주의와 자기표현 등의 가치가 중시됩니다. 지금 시대의 가치관과도 맞닿아 있는 대목입니다.






 저자는 가치관과 물리적 현실은 분리할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물리적 세계는 가치관을 담는 그릇이므로, 역사를 통틀어 도덕 철학자들이 한 일은 결국 본인이 속한 에너지 획득 단계에서 가장 유용하다고 판단되는(또는 가장 유용했으면 하는) 가치관을 개진한 것에 불과하다는 죠. 즉, 영구 불변의 가치관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다는 겁니다.


 사실 책에서 저자에게 반론을 제기했던 학자들처럼, 저 또한 '가치관'이란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었습니다. 한번 고착된 가치관은 쉽게 바뀌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고요. 어쩌면 태어나면서 일부 형성되고 자라면서 확고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요. 

 하지만 책을 읽고 난 뒤, 지금의 제 가치관 또한 시대상과 맞물려 형성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좀 달라졌습니다. 이영향을 준 책의 구절을 공유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어쩌면 우리 앞의 진짜 문제는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든 말든 결국 우리가 원하게 될 것은 무엇인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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