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저자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읽기 전 기대감이 컸습니다. 지인에게 추천받은 점도 그렇고,
요즘 핫한 작가라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동진의 파이아키아'에서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면서, 책은 더 유명세를 탔습니다.
글은 굉장히 흡입력 있게 진행되는 편입니다. 그리고 파격적으로 서술되는 측면도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지나치게 극적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있을 법한 서사로 진행되는데, 진행 방식이 평범하거나 뻔하지 않습니다. 보통의 예상과 다르게 펼쳐지는 전개가 인상적이었지요. 어떤 사건이 벌어질 듯하면서 벌어지지 않거나, 끝이 아닐 듯한데 끝나버리기도 합니다.
또한, 요즘 유행하는 밈이 등장하는 등 정통 소설과 대비하여 다소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호불호는 다소 있을 듯합니다.
소설은 총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아홉 편 중 아래 세 가지 단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첫 번째, 롤링 선더 러브]
최근 유행하는 데이팅 프로그램이 떠오르는 편이었습니다. '솔로농장'이라는 TV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지요. 예측과 다른 뻔하지 않은 전개가 매력적이었습니다. 저는 데이팅 프로그램 시청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이 소설은 재밌게 읽었습니다.
다만 혼자 등산을 가려다 모든 게 귀찮아져서 김밥만 먹었던 날에 맹희는 이렇게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새들의 지저귐 좋지. 근데 그런 거 말고…."
뒤에 무엇이 이어져야 할지는 맹희도 몰랐다. 어쩌면 새들의 지저귐보다 시끄럽고 갓 구운 빵보다 뜨거우며 조카의 해맑은 웃음보다 슬픈 무엇. 스크린도어도 없던 시절,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1호선의 굉음. 열차를 일부러 떠나보내며 나누는 입술. …… 여지없이 비가 쏟아지면 뛰다가 걷다가 고가도로 아래에 서서 젖은 몸으로 스스로를 비웃기. 바보 같지만 가끔 되풀이하고 싶은 모든 소란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열정일까, 견고한 파트너십일까.
둘 다 일수도, 둘 다 아닐 수도.
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도 부재를 느낄 수 있는지, 걔였는지 쟤였는지 이름과 얼굴은 지워졌어도 촉감과 온도와 음향, 아득한 형체로 남은 것들.
생각해보면 지나온 사랑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순간과 감정을 특정할 순 없지만 두루뭉술하게 남은 것들이 있었지요. 희미하고 경계가 모호하지만 흐릿함 중의 어느 순간은 너무도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바보 같지만 가끔 되풀이하고 싶은 모든 소란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라는 표현에 감탄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린 날의 사랑은 우당탕탕 실수 연속이었습니다. 평소라면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을 하고,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했지요. 이제는 어느 정도 자제할 줄 아는 안정적이고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가끔은 서툴러서 풋풋하고 애틋했던 그 시절의 사랑이 그립기도 합니다.
[두 번째, 보편 교양]
고등학교 3학년 선택과목 담당 교사인 곽의 이야기입니다. 곽은 연금 수령 시기를 기다리는 찌들었지만 적당히 열정도 남아있는 교사로서, '고전 읽기' 수업을 진행하며 다시금 열정을 불태웁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이 수업은 졸업 요건 채우기 위한 선택지일 뿐이죠.
소설에서는 현실에 있을 법한, 지금의 입시 세태를 풍자하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를 테면 우등생의 아버지가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는다며 민원을 넣었지만, 입시 컨설턴트가 괜찮다고 하니 넘어간 점, 결국 우등생이 서울대에 가며 미운 오리였던 고전 읽기 수업이 칭송의 대상으로 급부상한 점, 이런 소설 속 이야기가 지나친 입시 열풍의 세태를 반영한 게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곽은 아무리 훌륭한 스탠드업 코미디언도 자는 관객을 웃길 수는 없다는 비유를 생각해냈다.
역시 달콤했다. 경박한 단맛이 아니라 깊이가 있고 구조가 있는, 하지만 묘사해보려고 하면 이미 여운만 남기고 사라져서 어쩐지 조금 외로워지는 달콤함. 사람을 전혀 파괴하지 않고도 패배시킬 수 있는 달콤함.
소설 속의 곽이 대단하다고 느낀 점은 어느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는 겁니다. 대놓고 자거나 다른 과목 문제집을 푸는 학생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하지요. 교권에 순응하지 않거나, 대놓고 지시에 따르지 않는 학생들에게 '교육과정에서 자기표현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던 것'이라며, 학생 입장에서 이해해보려는 것만으로도 그는 참 교육자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세 번째, 무겁고 높은]
폐탄광 카지노의 도시에서 역도를 하는 송희의 이야기입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김기태 작가의 데뷔작이기도 하지요. 역도 선수인 송희의 목표는 우승이 아닙니다. 그냥 100kg의 무게를 들고 싶어서, 역도를 계속하고 있지요. 누군가 왜 100kg가 목표냐고 물었을 때 송희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냥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야. 그건 더 이상은 어길 수 없는 약속 같은 것이었다.
무거운 걸 들면 기분이 좋아?
그렇게 묻는 남자애가 있었다. 들지 못하던 것을 들면 물론 기뻤다. 하지만 버리는 기분은 더 좋았다. 더 무거운 것을 버릴수록 더 좋았다. 온몸의 무게가 일시에 사라지는 느낌. 아주 잠깐, 두 발이 떠오르는 것 같은. 송희는 그 느낌을 비밀로 남겨두었다.
단지 버리고 싶어서 드는 거라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역도를 해본 적이 없어서 무게를 버린다는 게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했지요. 송희는 소설 내내 본인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합니다. 클라이막스에서 아버지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떻게든 들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반전은 없더군요. 결국 마지막까지 그녀는 목표했던 무게를 들지 못하고 이야기가 끝나버리죠.
평범한 소설이었다면 어떻게든 목표를 달성하며 끝났을 텐데, 뻔한 결과로 흐르지 않아서 더 좋았습니다.
책에는 위의 세 가지 소설 외에도 색다르고 독특한 관점으로 잘 쓰인 단편들이 많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읽어보시면, 취향에 맞는 편을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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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디한 단편 소설을 읽고 싶다면,
세련된 감각의 이야기를 찾고 있다면,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