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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데르와 Sep 06. 2023

1-★. 건조한 크리스마스

눈꽃송이 길모퉁이








   성인이 된 후 언젠가부터는 눈 내리는 날이 싫었다. 철퍽거리고 미끄럽잖아. 어릴 때는 그런 어른들에게 배신감마저 느꼈다. 저렇게 포슬포슬 예쁘게 내리는 눈을 어떻게 싫어할 수 있지. 당시 나에게 '어른'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집합체였다. 그런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은 나도 삭막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매년 12월 23일 밤부터는 은근히 눈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래도 날이 날인지라. 각종 모양의 꼬마전구가 반짝거려 눈이 아파도, 종소리 섞인 캐럴이 귀를 때려대도 모두 용인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밤도 그랬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곳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기분이라도 낼 겸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 눈이 내리지 않아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기는 글렀지만 입김만은 선명해서 겨울인 게 실감이 났다. 방금 전까지 떠들썩하던 거리와 대비되는, 그렇다고 너무 후미지지는 않고 적당히 조용한 골목을 향해 모퉁이를 돌았을 때, 인도 한가운데 서서 어쩔 줄 모르던 사람을 발견했다. 그 사람은 아주 따뜻한 옷을 켜켜이 껴입었는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는 작은 행위조차 뭔가 굼떠 보였다. 그럼에도 나를 발견하고 다가오는 아우라 묘하게 편안했다.


   "저, 혹시 여기가 ○○○ 근처인가요?"

   "거기는 저쪽 방향으로 조금 더 가셔야 해요."


   바로 뒤 가로등 불빛이 너무 센 탓이었는지 역광이 져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키가 꽤 커서 올려다봤던 기억이 난다. 백발 포마드가 실루엣으로나마 정갈해 보였다.


   "고맙습니다. 거리가 매년 바뀌다 보니 찾기가 어렵네요."

   "이 주변 상권이 좀 그요."


   그 사람은 고맙다는 인사를 한 번 더 건네고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멀어졌다.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어플을 뒤지던 차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너 어제 ◎◎에 있었어?

   "응, 그쪽 한 바퀴 구경했어. 왜?"

   -아니, 어제 대학 동기들이랑 술 마시고 나오는데 저쪽에서 네가 보이길래.

   "아, 그래? 전혀 못 봤."

   -나도 애들이랑 있어서 인사는 못 했지, 뭐. 근데 애들이랑 지하철 타러 가는 내내 얘기했는데도 결론이 안 나서 전화했어."

   "뭔데?"

   -네가 할머니랑 얘기하고 있던 걸 분명히 봤는데, 누구는 네 친구가 왜 꼬마애랑 이 시간에 얘기하고 있냐고 하고, 다른 애는 비쩍 마른 아저씨랑 있던데 친구 위험한 거 아니냐고 가서 데려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잖아. 다들 딴소리하니까 나중에는 뭐 귀신에라도 홀렸나 싶더라니까.

   "아...."

   "그래서, 그 사람 누구였어?"


   당연히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변명했더라. 미지의 존재는 내 생애 가장 강렬한 경험으로 꼽힐만했지만 그에 대한 기억은 모든 것이 흐렸다. 누가 마법이라도 걸어둔 것처럼.

   이제는 겨울이 되면 보다 다른 것을 기다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어른인 척은 조금만 덜 하고 재잘재잘 떠들어보려 한. 아주 예전에는 당신을 밤이 새도록 기다렸다고, 내 겨울날 즐거운 이벤트가 되어 줘서 고맙다고, 가끔 생각하면 입술에 작은 호선 그려지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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