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지상에 가끔씩 나오는 극악한 사건들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미안해하거나 은혜에 감사하거나 하는 그런 맘은 둘째 치고, 인두껍을 쓰고 저럴 수도 있나
하는 일도 일어난다.
버스에서 스피커폰으로 전화하는 사람. 의자에 발 올리는 사람. 2인석에 앉을 때 다음 사람 앉기 불편하게 바깥 자리에 앉는 사람. 버스 타는 사람이라 그렇다? 비행기 좌석 등받이 문제도 자주 거론된다.
층간 소음문제로 살인 사건도 나오는 게 현실이다. 환갑 넘은 사람도 질투로 살인을 하기도 한다.
그 나이에 아직도 얼마나 사랑하는지.
반대로, 나는 절대 흉내도 못 낼 선행을 베푸는 선인도 가끔씩 본다.
성선설이 맞나, 성악설이 맞나 하는 논쟁도 있다.
나의 결론은? 둘 다 맞다.
1% 가능성을 두고 인간을 대하기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개연성이 있는 것을 가지고 준비하고, 인간을 대해야 할 것이다.
반에서 꼴찌 하는 학생이 열심히 공부해서 서울대 간다는 용기는 가상하나,
개연성은 없다. 물론 가끔씩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보통의 인간은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착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내가 배가 고파 죽을 듯한데, 내 밥을 내어줄걸 기대하지 마라. 피해만 안 주면 다행이다.
사는 게 더 힘들어지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사실 부자들이 어려운 이들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도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이 부자 동네에 산다고 한다. 그게 안전을 위한 개연성 있는 행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