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야 미운오리 새끼

by 보건교사 한티

“선생님, 솔직히 보건교사가 수업 시수가 제일 적잖아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보건교사는 다면평가 업무 곤란도에서 빠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학기 말 평가회나 교육과정 협의 시간, 어쩐지 내 마음을 콕콕 찌르는 말들이 들려온다.


“자, 이번 안건은 다면평가 내 수업 시수 항목에서 보건교사가 평균 시수를 받아 가는 것이 부당하다는 의견과, 코로나가 끝났으니 업무 곤란도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이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교무부장님의 말이 끝나자 적막이 흘렀고, 나는 용기 내어 손을 들었다.

“안녕하세요, ***입니다. 보건교사는 학생들의 건강을 유지·증진하고, 응급상황에 대응하기 위하여 배치되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수업 시수만으로 보건교사의 업무를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보건교사를 평가하려면 보건실 방문자 수와 건강 상담, 관리 횟수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요? 명확한 평가 기준이 아니기에 보건 교사에게 평균 시수를 부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학생 수가 900명에 달하는 학교에서 혼자서 보건 업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말을 이어가는 동안 목소리가 떨려왔다. 몇몇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는 듯 덤덤한 척했다. 아니, 솔직한 마음으로는 ‘선생님들은 서로서로 업무의 고충을 서로 이해하지만, 보건교사의 업무는 고유 업무라 다른 선생님들이 경험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내 업무가 힘든지 안 힘든지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는 거냐고, 보건교사가 하는 업무가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알고는 계신거냐고’ 소리쳐 따지고 묻고 싶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일한 지도 어느덧 5년. 대학 입시 중심의 분위기 속에서 수업시수가 적다는 이유로 진로수업을 담당해야 하거나, 보건 업무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늘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아.’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나의 열심은 존재감 없는 그림자처럼 평가받곤 했다.


“선생님이 하는 말들. 솔직히 피로감으로 다가오네요.”


공감받지 못한다는 박탈감. 그저 피로감으로 다가오는 나의 이야기. 메슬로우의 욕구 단계 이론에서 소속의 욕구가 세 번째라고 했던가. 이놈의 학교에서는 그 세 번째 단계를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왜인지 가슴에 박힌 가시 같은 말들은 흐릿해지지도 않는 건지.



Why does everyone hate me? Is it because I am so ugly? No one wants me. But I am really nice.

안데르센, 『미운 오리 새끼』 중



지독한 말들은 마음속에서 단단한 돌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어떤 날은 보란 듯이 인정받기 위해 애쓰다가도, ‘다 필요 없어. 나도 협조하지 않겠어.’라고 날카로워지기도 했다. 왜 이렇게까지 변해버린걸까. 이러려고 보건교사를 꿈꿨던가.


‘잠은 관에서 자자’라며 입시만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나라도 학생들에게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건강을 잘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또한 단순히 아픈 곳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들의 아픔을 듣고 위로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 나의 다짐은 어디로 간 것인지 타인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하기만 하는, 정체성을 잃은 교사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료들과 협조하여 잘 지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누군가는 나를 싫어하고, 나의 열정이 마음과는 다르게 부족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 보건교사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릴 필요는 없다는 것을.


나의 엔딩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사실 새끼 오리는 크고 아름다운 날개를 가진 백조였습니다.”라는 결말이면 좋겠지만, 현실 속 나는 여전히 미운 오리 새끼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왜 이 길을 선택했는지, 내 존재하는 이유를 믿고 견딘다면 언젠가 나만의 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백조가 아니어도, 못생긴 오리여도, 나는 충분히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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