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사구팽(兎死狗烹) 이란 말이 있다. 토끼 사냥을 할 때 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뜻으로, 필요할 때는 이용하고 이용 가치가 없을 때는 홀대하거나 제거한다는 뜻으로 그 말의 유래는 이렇다.
果若人言 狡兎死良狗烹 飛鳥盡良弓藏 敵國破謀臣亡 天下已定 我固當烹.
과연 사람들의 말과 같도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좋은 사냥개도 삶아지며, 높이 나는 새가 다 잡히고 나면 좋은 활도 광에 들어가며, 적국이 타파되면 꾀 많은 신하도 망한다. 천하가 평정되었으니 나도 마땅히 팽당함이로다. (사기:월왕구천세가)
범려라는 명신이 있었는데, 그는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춘추오패의 한사람이 될수 있도록 보좌한 충신이었다.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 한 뒤 왕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을 각각 승상과 상장군으로 임명하였으나 범려는 구천 왕이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영화는 함께 누릴 수 없는 인품임을 알고 월나라를 탈출하여 제나라에 은거하였다. 이때 범려는 위의 글을 편지로 써 보냄으로 문종에게 피신할 것을 충고하였으나 문종은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 왕으로부터 반역을 의심받아 끝내 자결하고 말았다.
유방과 항우는 초한지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이 이야기는 많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한 일화와 성격, 리더쉽에 대해 많은 사람들로 부터 회자되고 있다. 항우는 자기중심적, 권위주의적 인물로 평가하고 유방은 많은 인재를 두루모아 그들의 능력을 한껏 올리게 하는 리더쉽으로 평가를 하여 현대 경영에서 유방의 리더쉽을 더 높게 여기곤 한다.
항우는 독선적 아집으로 인하여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천하의 인재를 잃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한신을 유방에게 빼앗긴 것이다. 유방 자신이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긴 이유를 이야기 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자유자재로 지휘하며 승리를 거두는 점에서 나는 한신에 미치지 못한다” 한신은 항우 옆에서 훌륭한 인재로 남을 수 있었음에도 항우는 한신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고, 결국 한신은 미련 없이 항우를 떠나 유방의 곁으로 갔고, 결국 항우를 패망케 하는 적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방이 전국통일의 패권을 차지하는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한신은 유방에게 토사구팽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전락하고 만다.
사기에는 항우를 무찌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웠던 지략가 한신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한신이 한고조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초왕에 봉해졌으나 한신의 힘과 지략에 두려움을 느낀 한고조는 그를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항우의 부하이며 한신의 옛친구였던 종리매라는 장수가 한신에게 의탁하고 있었는데, 한고조는 그를 체포해 오라고 지시하였으나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한신의 부하가 종리매의 목을 유방에게 바칠 것을 권하고 있음을 안 종리매가 자결을 하였고 한신은 그의 목을 유방에게 바쳤으나 결국 한신은 한고조에게 체포되어 회음후로 강등되고 만다. 이 때 한신은 자신의 심정을 "교활한 토끼를 사냥하고 나면 좋은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하늘 높이 나는 새를 다 잡으면 좋은 활은 곳간에 처박히며, 적국을 쳐부수고 나면 지혜 있는 신하는 버림을 받는다"라고 표현하며 유방을 원망하였다 한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는 다섯째 아들이었다. 이성계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들들이 무인이었으나 이방원은 문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과도 왕래가 있어 이성계로부터 높은 신임을 받았다.
이방원은 통찰력이 뛰어나고 예리한 인물로써 정치력과 결단력이 탁월했다. 그는 여러 정치세력과 신하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활용하였는데, 문제를 판단하는 데는 명분이나 인연, 과거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이성계, 정도전과 갈등을 벌이게 된다. 정몽주 살해 사건은 이방원에게 치명적인 사건으로 조선건국 개국공신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왕으로서의 자질을 인정받지 못해 세자책봉에서도 동생 방석에게 밀려나게 된다.
이방원은 하륜을 브레인으로 삼고 처남 민무질 민무근 이숙번 이거이 등을 측근으로 삼아 1차 2차 왕자의 난으로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태종은 강력한 왕권 정치로 조선초기의 안정을 꾀하였고 아들 세종의 태평성대의 기틀을 다지게 되는데, 태종은 말년에 외척을 비롯한 왕자의 난 혁명공신들을 숙청함으로써 한고조와 같은 토사구팽(兎死狗烹)을 실행한다.
'육가의 고사'라는 말이 있다. 육가가 무력으로 중원을 평정한 한고조 유방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말 위에서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居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乎?")고 직언한 것을 말한다. 태종은 육가의 고사처럼 비록 자신은 무력으로 나라를 세웠지만 이후에는 피의 역사를 종식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아 그것의 걸림돌인 사병을 없애고 외척과 혁명공신을 자신의 손으로 제거하는 토사구팽을 택하였던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외에도 혁명후 토사구팽의 역사적 사실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이것은 멀리 있는 역사만의 이야기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고 혁명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바로 우리들 현실 속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