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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 Fontes Oct 05. 2015

시지프스(Sisyphus)

시시포스 또는 시지푸스(고대 그리스어: Σίσυφος['sɪsɪfəs], 라틴어: Sisyphus)는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서 코린토스 시를 건설한 왕이었으나, 영원한 죄수의 화신으로 알려져 있다. 시지프스는 바람의 신인 아이올로스와 그리스인의 시조인 헬렌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머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시지프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들의 편에서 보면, 엿듣기 좋아하고 입이 싸고 교활할 뿐 아니라, 특히나 신들을 우습게 여긴다는 점에서 심히 못마땅한 인간으로 일찍이 낙인 찍힌 존재였다. 결국 그는 신을 속인 죄로 저승에서 큰 돌을 가파른 언덕 위로 굴려 올려야 했는데, 정상에 올리면 돌은 다시 밑으로 굴러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돌을 굴려 올리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가 벌을 받게된 배경은 이렇다. 


도둑질 잘하기로 유명한 전령신 헤르메스는 태어난 바로 그날 이복형 아폴론의 소를 훔치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신이 태어난 동굴 속의 강보로 돌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 행세를 했다. 그런데 헤르메스의 이 완전 범죄를 망쳐 놓은 인간이 바로 시지프스였는데, 아폴론의 소를 훔친 범인이 헤르메스임을 고자질 했던 것이다. 아폴론은 헤르메스의 도둑질을 제우스에게 고발하였고, 신의 일에 감히 끼어든 시지프스는 이 일로 범행의 당사자인 헤르메스뿐만 아니라 제우스의 눈총까지 받게 되었다. 


시지프스는 더욱 결정적인 괘씸죄를 저지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제우스가 독수리로 둔갑해 요정 아이기나를 납치해 가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고, 아이기나의 아버지인 강신(降神) 아소포스를 찾아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 준다면 딸이 있는곳을 가르쳐 주겠노라 했다. 시지프스는 그 때 코린토스를 창건하여 다스리고 있었는데 물이 귀해 백성들이 몹시 고생을 하고 있으니 코린토스에 있는 산에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게 시지프스의 청이었다. 이에 아소포스는 시지프스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고, 시지프스는 그에게 제우스가 아이기나를 납치해 간 섬의 위치를 가르쳐 주어 딸을 제우스의 손아귀에서 구해냈다.  

시지프스의 소행을 알아낸 제우스는 저승신 타나토스(죽음)에게 당장 시지프스를 잡아오게 하였으나, 제우스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보복하리라는 걸 미리 헤아리고 있던 시지프스는 타나토스가 당도하자 그를 쇠사슬로 꽁꽁 묶어 돌로 만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죽은 후에 간다는 영혼의 세계인 명계(冥界)의 왕 하데스가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제우스에게 고했고 제우스는 전쟁신 아레스를 보내 타나토스를 구출하게 했다. 호전적이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아레스에게 섣불리 맞섰다간 온 코린토스가 피바다가 될 것임을 알고 시지프스는 순순히 항복했다. 그런데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가면서 시지프스는 아내 멜로페에게 자신의 시신을 화장도 매장도 하지 말고 광장에 내다 버릴 것이며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고 은밀히 일렀고, 저승에 당도한 시지프스는 하데스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읍소(泣訴)했다.  

   "아내가 저의 시신을 광장에 내다 버리고 장례식도 치르지 않은 것은 죽은 자를 수습하여 무사히 저승에 이르게 하는 이제까지의 관습을 조롱한 것인즉 이는 곧 명계의 지배자이신 대왕에 대한 능멸에 다름아니니 제가 다시 이승으로 가 아내의 죄를 단단히 물은 후 다시 오겠습니다. 하니 저에게 사흘간만 말미를 주소서."  

   시지프스의 꾀에 넘어간 하데스는 그를 다시 이승으로 보내 주었으나 시지프스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하데스가 몇 번이나 타나토스를 보내 경고했지만 오랫동안을 이승의 삶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하고 신중하다 한들 인간이 어찌 신을 이길 수 있었으랴. 마침내 시지프스는 타나토스의 손에 끌려 명계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하데스는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을 가리키며 그 기슭에 있는 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리라고 했다. 시지프스는 온 힘을 다해 바위를 꼭대기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위는 제 무게만큼의 속도로 굴러떨어져 버렸고 시지프스는 다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하데스가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시지프스는 "하늘이 없는 공간, 측량할 길 없는 시간"과 싸우면서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했다. 




알베르트 까뮈는 시지프스의 삶을 통해 부조리를 말했다.


부조리 : (1)  이치나 도리에 맞지 않음. 

             (2) [철학]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세계속에 처하여 있는 인간의 절망적 한계상황 이나 조건 


까뮈는 사회의 부조리를 발견하는 것은 자신이 시지프스의 인생임을 자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를 통해 까뮈는 인간의 전형을 본다. 세계란 이성을 가진 인간이 바라는 합리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인간의 합리적 욕망과 세계의 비합리는 충돌하게 마련인데, 까뮈는 두 명제의 이율배반으로부터 생기는 모순을 부조리로 파악한 것이다. 



까뮈는 부조리를 만났을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세 가지로 말한다



① 삶을 포기하는 자살을 통해 부조리로부터 도피하는 방법 


자기가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린 바위가 다시 원점으로 굴러 내릴 것을 뻔히 알면서도 계속 그 행위를 반복 할 것이냐, 아니면 자살을 해 버림으로써 이 운명에서 벗어날 것이냐. 여기서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절박한 문제가 제기된다. 하찮은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일상적인 삶에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여 허망함을 느꼈을 때, 인간은 죽음을 생각하게 되고 바로 그 때 자살의 문제가 대두된다.  자살은 스스로의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다. 자살은 삶에 패배했음을 자백하는 행위이며, 비겁한 도피행위이며, <나>와 <세계>의 대립에서 <나>를 말살함으로써 <세계>와의 대립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까뮈 역시 자살을 부정한다.




② 초월적인 존재에 귀의하는 타협을 통해 희망을 갖는 방법


희망이란 자기에게 주어진부조리한 운명을 회피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희망은 종교가 될 수도 있으며, 이성의 신화가 될 수도 있다. 혹은 모른 척 해버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희망은 위안을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위안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해야 하며 무엇보다 희망의 기반이 진정한 진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단지 부조리한 삶이 두려워서, 또는 진리를 기반으로하지 않는 희망은 스스로의 삶을 왜곡시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벌을 준 신보다 더 큰 진리의 절대적 존재에 귀의함으로 현실을 이겨나가는 방법이 진정한 희망이 되며, 최상의 방법이 될 수 있다.



③ 부조리한 세상에 맞서 반항의 형태로 끝까지 싸워나가는 방법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제 자리 걸음인 영겁의 고통....시지프스는 자기의 벌이 끝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절대로 절망하지 않는다. 그저 돌을 밀어 올리고, 정점에 도달하면 다시 언덕을 내려갈 뿐... 다시 돌을 밀어 올리고, 굴러 떨어지는 돌을 따라 내려가고...다시 밑에서부터 힘차게 돌을 밀어 올리고... 또 다시.....그것이 진정한 반항이라고 본다. 신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은 그에게 고통을 주기 위함이기 때문에 진정한 반항은 부조리한 세계를 그것대로 인식하고 '깨인'정신으로 '타협'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비록 고단할지언정 고통 받지 않으며 결국 승리자는 시지프스이지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까뮈는 시지프스를 부조리의 영웅이라고 한다.

시지프스의 삶을 부정함으로 바라 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이 순수해질 수 있으며, 성실과 노력의 삶이 속박이나 구속이 아니라 자유로 인식하게 될 때 삶을 책임지게 되고 결국 인간은 자신의 참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까뮈의 시각이다. 이것이 바로 까뮈가 말한 반항이다. 즉 삶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것이 부조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부조리의 본질을 깨달을 때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돌을 올려야만 하는 시지프스의 굴레가 우리들 삶의 모습으로 비유되곤 한다. 

다람쥐 쳇바퀴같은 현실과 나...

까뮈가 말한 방법중 나는 어떤 부류의 삶을 선택하고 있는가...

다 포기하고픈 마음으로 가끔씩 자살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신이 다 알아서 해줄 꺼야' 라며 모든 걸 맡기고 현실에서 도망가 있는가?

아니면 진정한 반항으로 현실과 맞짱(?) 뜨고 있는가?


빠삐용의 탈출 의지 끝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떠오른 시지프스...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우리 인생의 굴레를 어떻게 즐겨야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지를 그들을 통해 느껴본다.

잠자는 토끼를 지나쳐 골에 먼저 도달하는 것보다 깨워 함께 달려가는 거북이가 승리자로 인정받는 세상이 되기를...

올려 놓은 돌이 굴러떨어져 또다시 시작하더라도 응원가를 부르며 서로의 돌을 함께 밀어주는 사람이 많아지는 세상을 꿈꿔본다.

그리고 그 돌 위에 우뚝 설 시지프스의 모습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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