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사전을 보면 '육체 속에 깃들어 생명을 부여하고 마음을 움직인다고 여겨지는 무형의 실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부분의 문화에서는 인간 생명이나 존재의 비물질적인 원칙을 영혼으로 생각했고 모든 생물들이 영혼을 갖는다고 보았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힌두교 등 세상의 거의 모든 종교는 영혼불멸성을 따른다. 즉 육신과 영혼은 별개이며,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아 천당 지옥이나 인간 동물 등으로 환생한다고 믿고 있다.
기독교에서 영혼은 인간의 육신은 마치 사람이 육체에 옷을 입는 것 같이 영혼에게 입혀진 것이 옷이 육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혼의 존재는 불멸이며, 모든 인간의 영혼은 죽은후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여부에 따라 심판을 받고 천국 혹은 지옥으로 나뉘어 가게 된다고 믿는다. 즉 인간의 육체는 영혼이 존재하는 동안 거하는 임시거처일 뿐이며, 인간의 모든 지식과 기억을 포함한 자아는 영혼에 존재하기 때문에 육신보다 영혼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며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 각 개인의 사후세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킬 것을 가르친다
유교에서는 천지만물이 음양, 오행, 기의 집합으로 생겨나고, 그 기의 흩어짐으로 없어진다고 한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의 모임으로 태어났다가 그 기의 흩어지는 현상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뒤에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 혼백(魂魄) 역시 음양의 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시일이 지나면 마침내 흩어지고, 자연으로 돌아간 기는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내세를 믿지 않는다. 따라서 한번 죽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대를 이어감으로써 그 허무함을 달래고 영생의 욕구를 대신한다. 유교는 대가 끊어지는 것을 영생이 단절된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내세관이 뚜렷하였다. 죽음은 곧 다른 삶의 시작으로 종말이 아니며 전생의 업보에 따라 금생(今生)에 태어나서 다시 업을 짓고 죽으면 그 업과(業果)에 따라 내세가 열리지만 반드시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지은 업이 아뢰야식에 저장되며 이 저장된 업식에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사람, 천상으로 윤회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업을 닦고 내세를 예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형태라 본다. 그러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도 사바세계에서 생로병사의 사고(四苦)를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윤회의 고리를 끊은 해탈을 하여야 된다
도교는 현세에 중심을 둔 종교로써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이란 너무 허무한 것이기에 죽지 않는 장생불사(長生不死) 와 신선이 되는 성선(城仙)의 길을 택했다. 도교의 대표적인 서적인 ‘포박자’를 쓴 진나라의 갈홍은 거북과 학은 오래도록 산다고 하면서 어찌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겠냐고 갈파한다. 오래 사는 것에 대해 초기에는 불로초나 불사약 같은 것을 추구했지만 후에는 방향을 바꾸어 정신적 수양으로 해결하려 하였다.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도교에서는 죽음에 대한 해석을 신체는 관에 들어가지만 영혼은 신선세계에 간다고 했다. 이것이 도교에서 말하는 시해(尸解)이다.
이슬람교는 기독교와 그 뿌리를 같이 하면서도 서로 갈등의 관계이다. 기독교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죄가 있다고 하는 원죄설을 주장하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죄란 현세의 일상생활 속에서 가정환경이나 사회환경에 의하여 오염되거나 인간의 자유의지로 만들어내는 범죄일뿐 원죄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원죄가 없더라도 있는 죄가 씻김을 받지 않고서는 순결무구한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으므로 천국으로 가는 길목에서 ‘바르자크(연옥)’을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씻김이란 변태하는 과정이고 필연적으로 거쳐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영혼과의 분리이며, 분리된 육체는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교리에 따라 어디론가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세상 살 때 어떤 모습이었느냐에 따라 영혼이 가야 할 무엇인가가 결정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하는 곳을 위해 각 교리대로 행하려 하고 또한 이 세상을 살면서 복받기를 원하며 복을 빌고 있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께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성경 누가복음 12장 말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나의 영혼을 비롯한 나의 소유 모두를 내 것이라 말하는 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라는 부분이다. '도로 찾는다'는 것은 '돌려 받다'라는 의미로, 결국 영혼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나님임을 말씀하고 있다. 어떤 형식으로든 영혼과 육체의 분리, 즉 죽음이 반드시 찾아올터인데, 이 세상 살면서 내 곡간을 크게 짓고 여러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즐거워 하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 것인가!
누가복음 12장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중략)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이 세상의 곡간을 늘리며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 아니라 구제하여 나눠주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요 남을 괴롭히며 먹고 마시고 취하고 흥청망청 산다면 그 날에 벌을 받게 됨을 말씀하고 있다.
죽음의 정의를 어찌 세우고 살아가는지는 저마다의 몫일 것이라 누구도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이 있다고 믿고 있다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 어디론가 간다는 것을 믿고 있다면...
또한 이 세상의 삶에 의해 가야할 곳이 영향을 미친다고 믿고 있다면...
나의 곡간을 늘리며 평안히 먹고 쉬고 즐기는 것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베풀고 나눠주며 함께 살아가는 일에 좀더 집중해야 할 것 같다.
종교적 얘기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사는 삶이 더 인간답지 않겠는가...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