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
子 夜 吳 歌 (자야오가) .
李 白(이백)
長安一片月 (장안일편월)이요
萬尺擣依聲 (만척도의성)이라
秋風吹不盡 (추풍취부진)하니
總是玉關情 (총시옥관정)이라
何日平胡虜 (하일평호로)하여
良人罷遠征 (양인파원정)고
장안에 조각달 비추이는데
집집마다 잠못이루고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
가을바람 하염없이 불어오니
옥문관으로 치닫고 싶은 마음뿐이라네
어느 날에 오랑캐를 평정하고
우리 님이 먼 곳에서 돌아올까
이 시조는 이태백의 자야오가라는 시조로 오랑캐를 무찌르러 서역에 간 낭군을 기다리는 자야라는 당나라 여인의 애절함을 읊은 시조인데, 김영한이 사다준 당시선집(唐詩選集)을 백석이 읽다가 ‘자야오가(子夜吳歌)’라는 이태백의 시를 발견하고는 즉석에서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녀가 천억원대에 이르는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선뜻 송광사 법정스님에게 기부함으로써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오랜 기간 거절하던 법정스님은 1995년에 마침내 수락하고, 수십년간 정경관계를 주름잡던 대원각이라는 요정이 1997년 송광사의 말사인 길상사로 개원하게 된다.
그녀는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한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자 1932년 열여섯의 나이에 조선 권번(기생학교)에 들어갔다. 기명이 진향(眞香)이었는데 이미 혼인하여 딸을 낳은 적도 있다는 소문도 있다.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경성 관철동의 꽤나 개화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하였고, 동경의 문화학원을 수학한 모던한 취향의 엘리트 여성이었다. 그녀는 몇편의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던 이른바 문학기생 이기도 했다.
1935년 해관 신윤국 선생이 여학교를 보내주고 일본 유학까지 시켜주었으며,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우리민족의 삶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천재작가였으나 해방이후 북한에 남아 있었다는 이유로 금지작가로 묻혀 있다가 1987년대 해금되어 그의 작품이 세상에 소개되었다.
그는 고향에서 일곱 살에 오산 소학교에, 열세 살에 오산 고보에 입학했는데 선배 김소월을 매우 선망했었고. 열여덟 살에 오산 고보를 졸업했는데 학생시절 불교와 문학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가정 형편상 진학을 못하고 한 해 쉬면서 조선일보 신춘문예 공모에 소설이 당선 되었지만 나중에 소설은 단념하고 시에만 전념했다. 열아홉살 때 일본 청산학원으로 유학을 가서 영문학을 전공하며 조선에서 온 청년 문학도들과 어울렸고, 문학수업 뿐만 아니라 일본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으며, 1934년 일본에서 돌아온 그는 조선일보 교정부에 근무하였고, 1936년 '정주성' '사슴'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50여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작품에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였고, 한국과 만주일대를 유랑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스물다섯 살인 1936년부터 2년간 함흥에 있는 영생고보와 영생여고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이때 자야 김영한을 만나다.
자야 김영한은 자신을 여학교로 보내어 공부를 시켜주었던 신윤국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자 1936년 면회차 함흥에 왔으나 면회가 안되자 함흥에 머물며 권번에 들어가고 거기에서 백석 백기행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백석이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를 엮임하고 있을 때, 교사들 회식장소에서 진향(자야 김영한)이 백석 옆에 앉았고, 진향을 처음 본 백석은 손을 잡으며...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내사랑 백석' 에서)
그때 백석의 나이 스물여섯, 김영한의 나이는 스물둘이었다. 백석은 퇴근하면 진향의 하숙집에서 밤을 함께 보냈고, 자야라는 아호를 지어 주었다.
함흥에서 서울로 먼저 올라온 사람은 자야였다. 백석이 당시로는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 교사로 서울에 올라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혔고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곁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지고, 백석은 자야를 따라 함흥에서 서울로 올라와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혼례만 치르지 않았을 뿐 두 사람은 부부와 똑같았다.
그러던 중 정주에 있는 부모에게 불려간 백석이 매일 편지를 보내다가 열흘이 넘도록 소식이 없었다. 알고 보니 부모가 강제로 결혼을 시킨 것이었다. 당시 아들이 기생과 혼인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로, 백석은 부모에게 불려가 강요에 못이겨 혼인을 하였지만 초례만 치르고 도망쳐 나와 자야에게로 돌아오기를 두 차례, 그렇게 시골에 남겨진 신부만 두 명으로 서로 못할 짓이었다.
결국 백석은 갈등하다 마침내 결단을 내려 자야에게 결혼하여 함께 만주로 도망쳐 살자고 설득하지만 거절당한다. 자야에게는 이미 딸이 있었고 백석의 인생에 자기가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에 괴로워 했으며 또한 백석이 부모의 강요를 뿌리치지 못하고 다른 여인들과 혼례를 올린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도 있었다. 그러자 어느날 새벽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 한 장을 남기고 집을 나가는데 이것이 두사람의 영원한 이별이 되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1939년 백석은 혼자서 만주 신경으로 떠났다.
이것이 자야에게 백석과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42년 백석은 만주 안동에서 잠시 세관업무를 하기도 했는데, 해방되자 북한에 조만식선생의 사랑을 받아 눌러 앉았고 자야는 서울 대원각 여주인이 되었다. 생전의 자야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연인 백석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노년의 자야는 백석의 詩를 조용히 읽는 게 가장 큰 생의 기쁨이었다 한다. 자야는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의 시는 자신에게 있어 쓸쓸한 적막을 시들지 않게 하는 맑고 신선한 생명의 원천수였다"고 술회했다.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 길상사는 1997년에 개원했는데, 사찰규모는 대지 7.000여평으로, 수림이 울창한 계곡을 끼고 있다. 이곳은 원래 우리나라 근대 정치사에 등장했던 3대 요정(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의 하나였던 대원각이었다. 이 대원각의 여주인 김영한 할머니가 여기 7.000평의 땅을 모두 법정스님께 시주하여 길상사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평생동안 한 사람을 사랑했던 자야 김영한은 법정 스님이 쓴 ‘무소유’를 읽고 감명하여 그의 전재산인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하였다. 당시 대원각은 7,000여 평으로 시가 1,000억원을 넘었는데, 그가 받은 것은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법명이 전부였다.
그 때 어느 기자가 물었다. 이 많은 재산이 아깝지 않습니까?
그러자 자야가 대답하였다. ‘무엇이 아깝습니까, 백석의 시 한줄 값도 안되는 것을’
자야는 기생들이 옷을 갈아 입던 팔각정 자리에 범종각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자야의 유해는 유언대로 화장하여 한겨울 눈이 수북히 쌓인 길상사 마당에 뿌려졌다.
그리고 1999년 12월 KAIST에 자야의 유언장이 도착한다. 국가과학기술 인재양성에 써달라 하는 내용과 함께 100억원이 넘는 자야 김영한의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한 것이었다.
한 세상을 살면서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감동을 주는 인생과 감동을 받는 인생이 있으니
사람들 마음속에 품은 가치가 같을 수야 있을까마는 비슷한 흉내라도 내고 싶다면... 이것도 욕심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