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 조선왕조실록
1281년(충렬왕 7)경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이 편찬한 역사서로서, 한국의 고대사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와 함께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책이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서 가운데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였는데, 단군을 나라의 시조라고 언급한 점은 우리 역사의 자주성을 말해 주고 있다. 당시 고려는 몽골과의 기나긴 전쟁으로 깊은 좌절과 상처를 경험한 시대로, 우리도 중국에 못지않은 역사와 뿌리가 있고 신비로운 이야기와 문화적 유산을 공유하는 민족이라는 자부심과 용기를 주기 위해 이 역사서를 기술했다.
삼국유사는 정사의 성격을 지닌 『삼국사기』와는 달리 향가나 이두로 표기한 글도 있고 야사(野史)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일연이 삼국사기를 “정사”라고 존중하면서 삼국사기에 채 실리지 못한 단군조선, 가야, 이서국 등의 기록과 수많은 불교 설화 및 향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가 정사가 아니라고 해서 만록(漫錄) 정도로 취급하기는 어렵다. 물론 신이(神異)한 사화(史話)가 많음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많은 사료를 수집, 전거를 밝혀 인용하고 고대사료의 원형 전달을 도모한 역사서술 방법 기인하는 것으로, 이 책에는 일연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의식이 스며 있다.
오늘날 삼국유사는 한국고대의 역사·지리·문학·종교·언어·민속·사상·미술·고고학 등 총체적인 문화유산의 원천적 보고로 평가되고 있다. 이 책에는 역사·불교·설화 등에 관한 서적과 문집류, 고기(古記)·사지(寺誌)·비갈(碑喝)·안첩(按牒) 등의 고문적(古文籍)에 이르는 많은 문헌이 인용되었다. 특히, 지금은 전하지 않는 문헌들이 많이 인용되었기에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만일 삼국유사가 정사 아니라는 이유로 폐기처분되었다면, 그래서 삼국사기만 남아 있다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고대 역사에 대한 소중한 많은 자료를 잃어 버려 ‘단군신화’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의 이야기도 ‘만파식적’의 이야기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각 왕들에 대해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매우 엄격한 규율에 따라 작성된 역사서가 이다. 이 책은 반드시 해당 왕의 사후에 작성되었으며, 임금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고, 사관들은 독립성과 비밀성을 부여 받아 사소한 사항까지도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작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과 광해군은 폐위되었다 하여 일기라고 부르나 실록의 내용을 지니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신하인 사관들에 의해 기록되었으면서도 왕의 간섭을 받지 않고 기록된 역사서로 높은 평가을 받고 있다. 세종대왕은 물론 그의 아버지인 태종도 자기의 아버지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기록을 보게 되면 실록을 본 왕으로 기록되는 오명이 두려웠고, 아버지를 평가한 사관들을 보복할까 두려웠고, 그래서 자신에 대한 역사의 기록이 왜곡되어질까 두려웠던 것이 볼 수 없었던 이유였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받는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조선왕조실록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 고종과 순종에 대한 실록은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져 조선왕조실록의 편찬 규례에 맞지 않고, 일본 제국의 관점으로 작성되어 왜곡된 바가 크다고 판단하여 포함시키지 않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은 철종(哲宗) 때까지의 실록을 의미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 서정적 표현, 주관적 기술의 세 측면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정의되고 있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는 "있었던 그대로의 과거"를 밝혀내는 것이 역사가의 사명이라고 하여 객관적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에 비해 에드워드 핼릿 카는 '과거의 사실을 보는 역사가의 관점과 사회 변화에 따라 역사가 달리 쓰일 수 있다'고 하였다.
역사를 돌이켜 살펴본다는 의미는 고증도 그렇지만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뜻을 품고 있다. 과거를 앎으로써 그것을 거울삼아 현재를 비추어 보고 아울러 미래에 나아갈 길을 정하고자 하는 데 있다. 따라서 사회의 격동기나 전환기에는 으레 역사에 대한 회귀 현상이 일어나며, 또 그 속에서 시대 특유의 사론(史論)과 사관(史觀)이 피력되는 것이다.
역사는 흐르는 큰 강물과 같다. 물줄기의 방향 바꾸고자 한다 해서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고 막으려 한다 해서 쉽게 막히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물줄기보다 더 강한 힘이 있으면 가능할지는 모르나 그에 대한 부작용은 고스란히 어느 누군가가 반드시 댓가를 치뤄야만 한다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었다. 그래서 역사의 평가는 후대에 맡겨야 하며 현대는 물위의 나뭇잎처럼 함께 흘러가야 한다.
역사의 심판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문제는 아전인수라는 것 아니겠는가...
역사 교과서를 하나로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개로 할 것인가...
역사교과서를 작성하는 사람들의 시각이 어떠하며 이것을 감수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참으로 생각도 많고 말도 많은 오늘날이다.
훗날 이것까지도 평가하는 것이 바로 역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