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자기 편의적 육아를 경계하며...
각자의 문제를 직면하는 대신
희생양을 통해 상황을 정리합니다.
희생양은 부모의 말을 잘 들으니까요.
모두의 평화만을 목표로 삼다 보면
착하고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언제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어쩌면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희생양 이론’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된 개념은 얼마 전 오은영 박사님을 통해 처음 듣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가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온화하고 사려 깊은 언행을 하려 늘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내면 깊숙한 곳부터 온전히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당연하게도, 내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들끓고 있고 그중에는 분노와 경멸, 시기와 미움 등 부정적인 감정들 또한 뒤섞여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그릇 또한 아직 턱없이 작고, 고지식한 탓에 갈등을 해결하는 지혜 또한 유연하지 못하다. 어쩌면 타고난 심성보다도, 갈등에 대한 회피적 성향 때문에 온순하게 보이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실 누군가와 불쾌한 정서를 마주하는 일이 꽤나 무섭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외부에서 보기에 ‘말 잘 듣고 착하다’라는 이유로 희생양이 되어 버리는 일이 많았다. 내면이 단단할 때에는 이런 일에 별로 타격을 받지 않는다.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서 인생도 결국 내력과 외력의 싸움이랬지) 그러나 내면이 휘청거릴 때에는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억울함의 정서에 휘감겨 나라는 자아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래도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표현할 정도의 이 이론에 대해 듣게 되니, 희생양을 만들게 된 이들의 “입장”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억울함과 자책으로만 해석되던 상황들을 실제로 잘못한 이들의 탓으로 돌릴 수 있기에 조금은 마음이 나아진 것 같았다.
욕심이 많고 화를 잘 내는 형제와 자랐다. 나도 아이를 나아 키워보니 엄마 입장에서도 언니를 키우기가 참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엄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겠지. 내가 잘못했거나 나를 덜 사랑해서가 아니었구나라고 어린 시절 나를 토닥일 수 있었다.
엄마는 우리 자매를 그렇게 키웠지만 나는 절대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언니처럼 욕심 많고 감정적인 아이가 첫째로 태어났고, 이타적이고 온순한 아이가 둘째로 태어났다. 우리 자매처럼 연년생으로 나란히.
하지만 절대 같은 잘못을 하지 않겠다고 한 다짐은 되려 과민반응으로 변질되었거나, 아무리 다짐했다고 한들 나 또한 희생양을 만들며 쉽게 해결하려 한 적이 많았을 것이다.
어린아이들 사이에 생기는 갈등은 너무 사소하고 어수선해 오랜 시간 충분한 합의를 이끌어 나가는 게 오히려 적절치 않은 경우가 많다. 굳이 길게 끌어 좋을 것이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결국 누군가의 양보가 있어야만 원만하고 쉽게 해결된다. 하지만 양보는 강요되는 순간 양보라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둘 다 양보 안 할 거면 못 노는 거야’라며 관계를 끊어버리는 방식이 반복된다면, 그 또한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미해결 된 채 다른 주제로의 환기를 통해 상황이 전환되어 버릴 때도 많다. 이렇게 갈등을 덮고 피해버리기만 하는 것도 계속된다면 아이들은 서로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엄마라면, 아이들의 일에 있어 일방적인 양보와 희생은 없어야 함을 늘 머릿속에 가지고 있어야 할 것 같다. 아이들 각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문제를 직면하는 것. 그리고 눈앞의 욕심보다 더 큰 가치, 그리고 그것이 주는 기쁨과 마음의 성장을 작게라도 계속해서 경험하게 해주어야 할 것 같다.
나도 다 못 컸는데... 사람을 키워내는 일은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