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이해
중간이 필요해. 아니면 편법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낸 경험은 없다. 하지만 내게도 언젠간 그런 일이 찾아오겠지. 그 모습은 선뜻 그려낼 수가 없다. 누군가의 비극적인 사연을 마주할 때도 안타깝다는 마음은 들지만 그들의 슬픔을 가늠해 내기는 쉽지가 않다.
나는 가족들과 갈등이 생길 때 주로 참거나 양보하려고 하는 편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가족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내 생각이 99% 옳다 생각함에도 한발 뒤로 물러서는 건 쉽지가 않다. 그럴 땐 사실 난 종종 그런 생각을 한다.
'만약 이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면 나는 오늘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을까'
그렇게 후회하지 않기 위한 이유로 갈등을 잠재우곤 한다.
이런 방법은 감정적 실수를 줄일 수는 있지만 근본적 해결은 회피하기에 좋은 방법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직도 서로의 다름으로 인한 갈등을 마주하고 해결해 내는 방법을 잘 모르겠다. 기껏 참았던 감정이 불쑥 올라와버리기 십상이고 서로 다른 생각의 중간 어디쯤에서 합의를 이뤄내기가 너무 어렵다. 사실 내 속에는 중간 지점이 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성향은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이라는 걸 사실 좀 늦게 알았다. 어느 책에서 읽었는데 흑백논리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뭘 하든 잘하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데 그러다 보니 내 성적을 1등 아니면 실패라는 이분법으로 점수 매기곤 했던 것이다. 세상엔 100점도 있고 80점도 있고 50점도 있는 건데 말이다. 50점을 맞아도 ‘내가 그래도 반걸음을 왔구나 애썼다 힘내서 반걸음 더 가볼까?’ 하면 될 것을 50점이 뭐냐며 좌절감만 크게 느꼈던 것이다.
지금은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으려 애쓴다. 결과보단 과정을 후회 없이, 그리고 너무 애쓰다 지치지 말고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는지에 집중하려 한다.
갈등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나만 옳다는 생각을 조금은 내려놔야 하는데 아무리 겉으론 그런 척해도 솔직한 속내는 그렇지 않은가 보다. 그래서 양보는 해도 납득은 잘 안될 때가 많다.
이런 걸 그릇이라고 하는 걸까. 아직 내 그릇은 작고 울퉁불퉁한가 보다. 살살 잘 두드려 조금씩 키워 나가고 싶다. 쾅쾅은 말고 살살..
문득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과거의 어느 이야기가 생각난다.
예전에 타인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 많은 일을 했을 때였다. 패기와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나이였기에 철저히 검토해서 준비한 나의 계획은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고 상대방은 납득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거드름을 피우며 매번 태클만 놓는 것이다. 그래도 그의 동의가 필요한 관계였기에 그를 설득시키려 열을 올려야 했다.
씩씩 대며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나를 조용히 지켜보던 상사가 이렇게 말을 했다.
“절대 화를 내선 안 돼. 화를 내면 죽어도 상대방을 설득시킬 수 없거든.”
[해와 바람]의 이야기처럼.. 나는 강풍만 불어댔던 것이다. 벗어! 벗으라고!!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과정에서 아무리 답답해도 흥분하지 않으려면 상대방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이 왜 그러는지를 알고 그 관점에서 수용될만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해하려 해 봐도 도무지 납득이 안 되는 상대가 있었다. 그때의 그 상사가 또 이렇게 얘기해 주었다.
“저 사람 어릴 때 머리를 크게 다쳐서 뇌수술을 받았대. 그래서 아직까지 후유증이 남아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야 그러니 이해가 안 될 땐 저 사람이 뇌를 다쳐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해”
그날 이후, 그 사람과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사안을 마주해도 그를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때 상사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 같다. 그 이후로 오랜 기간 그 상사와 일을 하면서 뇌를 다친 사람 이야기를 여럿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꼬장꼬장하던 거래처 담당자는 좋은 여자분을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면서 세상 너그럽고 다정한 사람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매번 사람들이 뇌를 다쳤다고 얘기하던 상사는 지금 꽤나 성공한 사업가로 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