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90%는 가족을 위해 이루어져 있다. 눈 뜨는 직후부터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아이의 스케줄과 준비물을 리마인드 한다. 그리고 아이들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먹는 동안 날씨에 맞는 옷을 꺼내어 준다. 사소해 보여도 제대로 챙기지 않으면 아이들의 하루가 불편해질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 발목 골절이 생긴 둘째를 매일 휠체어에 태워 등하교를 시켜주고 있다. 청소와 빨래, 장보기 등 눈에 보이는 집안일만 해도 미리미리 해두지 않으면 금세 엉망이 되어 버린다. 주말에 있을 아이들 축구대회에 도시락과 응원도구도 엄마들과 의논해 미리 준비하고, 친정 아빠 생신 모임 장소 예약과 용돈 봉투도 챙겨두어야 한다. 오늘은 마침 아이들 방과 후 참관수업이 있는 날이라 시간 맞춰 준비하고 다녀오려면 오후 시간에 여유가 없을 것 같다. 아이들 학습지도도 매일 빼먹을 수 없는 일과다. 책의 내용 하나를 알고 모르고가 인생에 중요해서가 아니라, 계획을 세웠으면 귀찮다고 거르지 않는 책임감 있고 꾸준한 학습 태도를 기르는 데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는 특히 더 성의 있게 차리려고 하다 보니 오후 서너 시 경이되어도 생각해 둔 게 없을 경우에는 점점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밑반찬 외에 메인 요리 하나는 매일 다른 메뉴로 만들고 꼭 갓 지은 따뜻한 밥만 차려주려고 한다.
전업 주부가 되면 워킹맘 때보다 여유롭고 편안해질 꺼라 생각했다. 물론 어느 부분에서는 맞기도 하다. 몸이 둘이 아닌 이상 어차피 불가능한 일들이기에 워킹맘은 최대한 꼭 필요한 일 위주로 촘촘히 시간 계획을 잘 짜 맞춰 쳐내듯이 일을 해내야 하니까. 하지만 주부가 되고 나니 그만큼 가사와 육아의 책임이 더 무거워지고 돌보아야 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눈에 밟힌다. 사실 워킹맘일 땐 모른 체 덮어두었던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병원 진료나 미뤄둔 이불 빨래, 처분은 안 되고 쌓여만 가는 세간살이, 건강이 고려되지 않고 빨리 차려낼 수 있는 식단 등이다. 그렇게 돌보지 않은 일들이 조금씩 병들어가고 있음을 애써 외면한 채…
하루를 허투루 살고 있는 것은 아닌데 마음의 공허함이 불쑥불쑥 찾아오곤 한다. 얼마 전 <종이달>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슴에 쿵 하고 박히던 대사가 있었다.
유이화 : 나..
최기현 : 아, 장인 장모님 납골당 안치 기간 만료됐다고 하던데 수목장으로 이장해요.
유이화 : 연락 못 받았는데요? 왜 딸인 날 두고 당신한테..
최기현 : 거기 모실 때 돈 낸 사람한테 연락했겠지.
유이화 : .. 저축 은행 면접 볼래요.
최기현 : 지금부터 벌어서 이장해 드리게? 수목장 계약해 놨어요.
유이화 : 나 일할래요.
최기현 : 생활비 부족해요?
유이화 : 아니요. 나도 당신처럼 매일 출근할 곳이 필요해요.
최기현 : 돈이 아니면 아, 집에서 살림만 하기 미안해서 그래요? 괜찮아요.
유이화 : ..
최기현 : 집안일이 힘들구나? 하긴 당신도 이제 몸이 힘들 나이긴 하지. 저축 은행 알바가 의자에만 앉아 있는 게 아니에요.
유이화 : 나도 돌아올 곳이 필요해요.
최기현 : 알아듣게 말해 줄래요?
유이화 : 난 내가 이 집 빌트인 같아요.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자리만 차지한 거 같아요.
최기현 : 알아듣게 말해 달라고 했는데.
유이화 : 이 집이 내가 돌아오고 싶은 곳이었으면 좋겠어요. 매일매일 여기로 돌아오고 싶어 졌으면 좋겠어요. 출근하면 퇴근하고 싶어질 거예요. 빨리 와서 쉬고 싶어질 거예요. 그런 게 필요해요, 나도.
최기현 : 차가운 거 한잔 줘요? 마시고 침착하게 자기 생각을 글로 정리한 다음에 얘기해 봐요.
이 드라마에서 최기현은 정말 주먹을 부르는 캐릭터이다. 언제나 고상한 말투로 자신의 아내를 한없이 자연스럽게 무시하는데, 정작 본인의 속은 하찮기 그지없다. 자격지심과 성공 욕심으로만 가득 찬 남편에게 말 잘 듣고 착한 아내는 참으로 유용했을 것이다. 그런 아내가 말을 한다.
“나도 돌아올 곳이 필요해요”
지난 15년 간 나의 일은 곧 나의 자아였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태어나던 날 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나는 끊임없이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나의 선택으로 가족을 위한 삶을 택했다. 그리고 원했던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늘 공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의 일. 나만의 일. 내 것이 필요했다.
몇 달만의 사적인 대화였다.
"나...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생겼는데..."
사실 며칠 전부터 꺼내고 싶던 말이었는데, 괜한 생각일까 싶어 입 안에만 맴돌던 얘기였다.
남편이 대답했다.
“뭐 하러~ 힘들게… 괜히 스트레스받을 것 같아. 힘들 거야. 그 시간에 아이들을 좀 더 챙겨. 차라리 운동을 하는 게 어때?”
마치 나를 위하는 듯 보이는 그 말들은 지금 내가 무엇에 갈증을 느껴서 하는 말인지 조금도 공감하지 못한 답이었다. ‘역시나… 저럴 줄 알았지. 내 생각에 동의하는 일은 좀처럼 없으니까… 마음을 알아차리는 건 더더욱… 역시 괜히 얘길 꺼낸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또다시 말을 잇는다.
“차라리 내 일을 도와줘. 네가 잘하는 일이잖아. 더 큰돈을 벌 수 있는데 왜”
“그 일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 그리고 난 너의 일, 아이의 일 말고 “나”의 일을 하고 싶어. 난 이미 충분히 아이들을 위해 살고 있어. 여기서 더 하는 건 과해. 오히려 아이들에게 좋지 않을 정도로.. 난 나의 일을 하고 싶어. 그게 힘이 들든, 스트레스를 받든, 하찮든, 돈이 안 되든… 그냥… 재밌을 수도 있잖아. 어쩌면 잘할 수도 있잖아. 남은 인생에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다면 지금이 내게 가장 젊은 시기야.”
“재미있는 일이 어딨어” 란다.
“내가 말하는 재미는 “Fun”이 아니야. 일의 재미라는 말이지. 일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당연해. 생각을 하고 문제를 풀어가야 할 테니까.. 그래도 일인데 뭐 어때.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 보람을 느낄 수도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 아이들도 점점 크고 자기 일을 잘해나가고 있는데, 나는 점점 더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시간이 늘어날 거야.”
남편은 종이달의 최기현이라는 인물과 같은 얼굴로 ‘알아듣지 못하겠는걸’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어쨌든 내가 이걸 해도 너는 상관없잖아?”라는 말에 “그렇긴 하지”라는 말로 대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서 나의 재능과 노동력을 아까워하는 내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나를 하나의 자원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로 인해 피곤해지는 일을 흔쾌히 받아들일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쉬운 듯 또 말을 덧붙인다.
“차라리 가게를 하는 게 어때?”
난 가게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는데 이 또한 나에 대한 공감이 1도 없는 제안이다.
“혹시라도 내가 이 일을 잘하면 사업을 할 수도 있지.”라고 했더니, “그렇다면 훨씬 낫지. 그걸 먼저 얘기했어야지”라고 한다.
내가 하려는 일이 하찮아 보여서 여태 탐탁지 않은 표정을 지었던 걸까. 할 거면 더 큰일을 하라고… 라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나의 과해석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