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바쁠 때는 1년에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보내던 세월도 있었다.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5분만 더 10분만 더' 하며 다리를 꼬고 참아내며 업무 한 줄이라도 더 쳐내려 급급했다. 사실 누가 그렇게 시킨 적은 없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에 빈틈 하나 없이 조급했다. 나에게 일각이라도 틈이 있다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조금이라도 머릿속을 털어내고 싶을 뿐이었다. 이토록 버거운 세월이 지나 그 끝에 드디어 여유로운 날들이 찾아온다면, 난 기필코 평일 대낮에 압구정 로데오 거리 테라스 카페에 앉아 방금 서점에서 사 온 책을 읽을 거라고… 그렇게 다짐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결코 올 것 같지 않았던 그날이 되었을 때, 실제로 난 내가 상상했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어떤 책을 읽었었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질 않지만(아마 [너는 내게 상처를 줄 수 없다] 같은 제목이었다), 그때의 감정은 너무나도 생생하게 한 장의 사진처럼 내 마음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그 이후로 꽤 오랜동안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상을 유지하고 있다. 매일매일 원 없이 책을 읽으며 지내다 보니, 오히려 책을 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삶의 어려움을 직면할 때, 난 책으로 도망갈 때가 많다. 책은 지금 당장이라도 어느 곳에서라도 책장을 펼치는 순간 내가 원하는 세계로 빠져들 수 있다. 순간이동 능력만큼이나 편리한 취미생활이다.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소한 말 한다디에 숨이 턱 막힐 만큼 당황스러울 때에는 책만큼 좋은 친구가 없다. 늘 정제되고 안정감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의 어수선하고 느린 생각도 차분히 경청해 준다. 깊이 있는 조언을 해주지만 날 타박하지도 않고 되려 나를 존중해 주는 느낌이다. 내 그릇이 넘쳐 잠시 그만하고 싶을 땐 눈치 볼 것 없이 책장을 덮어 다음을 기약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당장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해도, 누군가의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이야기를 통해 마음이 경쾌해진다. 적어도 책을 읽었다는 이유로 마음이 불쾌해졌던 경험은 없다.
집 안을 늘 말끔하게 정돈해 두는 편이지만 머무는 곳곳마다 책이 쌓여있곤 한다. 유일하게 정신없게 쌓여 있어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물건이다. 집안 곳곳에 책 읽기 딱 좋은 스팟을 만들어 놓고 그때그때 아무 거나 손에 집히는 대로 읽다 보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책을 손에 집에 든다. 책=쉼, 책=놀이, 책=재밌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책을 많이 읽은 아이들과는 이야깃거리도 풍부해지고 점점 더 풍성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책은 잘 읽지 못하기도 하고 좋은 책을 고르는 스킬도 많이 부족하다. 그래도 마음이 헛헛할 때 서점에 들러 종이냄새를 들이마시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도서관에서 책 한 권과 한 나절을 보내고 나면 그날 하루는 좀 숨 쉴만하다.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