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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Jun 13. 2023

신입으로 돌아 간 마흔두 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한 걸음

"다음 주 월요일부터 6일 간 신입 교사 교육이 진행됩니다."


스케줄이 정해진 플랜은 생각 없이 따르기 쉬워 좋다. 덕분에 고민하지 않고 움직여도 어떠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교육 장소가 그리 멀지 않기도 했고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10시는 그다지 부담스럽지 않은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직장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심신의 정돈에 신경 쓰며 여유롭게 준비를 했다. 25분 플로우의 아침 요가도 하고 꼼꼼히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화장은 적당히, 옷차림은 편하면서도 단정하게, 교육생에 어울리는 수수한 모습으로 준비를 했다. 교육 들으며 마실 커피도 한잔 내려 예쁜 텀블러에 담아 집을 나섰다.


이럴 수가. 내비게이션 도착 예정시간이 수업 시작 4분 전으로 찍힌다. 시작 10분 전까지는 입실 완료하라는 안내를 분명히 받았는데... 이대로라면 10분 전 입실은 커녕 주차하고 올라가면 100% 지각이다. 아.. 일을 오래 쉬더니 감을 잃었구나. 거침없이 액셀을 밟아 한큐에 주차를 하고 잽싸게 튀어 올라갔지만 1분 지각. 늦으셨다는 말에 죄송하다 인사하며 주차 자리가 없었다는 궁색한 핑계를 만들어 본다. 영락없는 신입사원의 모습이군.


20년 차 교육국장의 회사소개로 첫날 교육이 시작되었다. 좋은 컨디션으로 왔더니 오랜만에 듣는 교육이지만 힘들지가 않다. 익숙했던 이름의 회사이긴 했지만, 이 회사의 최초 역사와 지금까지의 사업 전개 방향, 성공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관심 있게 들여다 보았다. 보통은 '방문 학습지'라고 생각했던 시장. 모든 산업이 디지털화되는 현재에는 '학습 컨텐츠 플랫폼'으로서 비즈니스를 재정의하는 것이 맞겠구나. 그에 맞춰 디지털로의 전환이 빠르게 이루어졌고, 그렇다면 경쟁사의 범위도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 독서 교육의 강점과 교사의 관리 시스템이 결합되었다는 측면을 강조한다면 경쟁력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15년 간 광고 비즈니스를 하면서 새로운 광고주를 만날 때마다 수도 없이 해왔던 생각의 흐름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할 필요는 없는데, 아직도 직업병처럼... 그런 생각을 하며 교육을 들었다.


'이 회사도 언젠가 내 회사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올까?'


수업을 시작하고 끝낼 때마다 외치는 구호와 동작이 있다고 했다. 마지막에는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려야 한다. 진지하게 임하는 만큼 민망해하지 않으려 애쓰며 목소리도 크게 동작도 크게 열심히 해본다. 현타가 온다. 너무 열심히 외치진 말아야겠다.


입소식이라는 걸 한다고 했다. 이쪽 필드에서 수없이 많은 교사들을 이끌어 왔으리라 여겨지는 에너지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업본부장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왜 늦은 나이에도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지 각종 명언 등 온갖 자료를 모아 수십 가지의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을 한다.


순서가 이상하지만 첫날 교육 후에 면접이 진행되었다. 수백 번 아니 수천번은 봤었지. 지원자가 아닌 면접관으로... 또다시 애써 과거를 지우며, 본부장 앞에 나란히 앉은 4명 중 1명이 되어 자세와 표정을 고쳐보았다. 어차피 정답은 없는 질문인 걸 알기에 그저 성의 있고 차분하게 답해본다. 세상의 모든 문제에는 답이 있지만 내가 모를 뿐 어려운 상황이 생기더라도 마음만 있으면 결국 해낼 수 있다는 식의 답변을...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집안을 말끔히 정돈하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며 가족들을 맞이했다. 가족들에게는 자세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기도 하고 마음만 먹으면 원래 있던 업계로 돌아가기에 많이 늦은 것도 아니기에 나도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자꾸 복잡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아무 생각 없이 이곳으로 오는 이유는... 무언가가 되고 싶어서도, 돈이 필요해서도, 이 일이 너무 좋아서도 아니다. 어쩌면 이 길 끝엔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결코 쉬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4년 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단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던 날이 있었다. 그렇게 어이없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려 지금까지 왔다. 수백 명의 직원과 회사의 미래가 마치 내 손 위에 있다고 착각했다. 수백억의 광고비를 지출하고 회사의 사활을 맡긴 광고주들의 압박. 성패에 대한 부담을 넘어선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한 죄책감까지... 지나친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눌렀을 때 결국 내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은 그때로 돌아가 실제 같은 악몽을 꾼다.


부디 다시... 발걸음을 떼고 싶었다. 이유가 있다면 단지 그것뿐이다.

주저앉았을 때만큼이나 지금의 시작도 그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한쪽 발을 땅에 붙이고 나머지 한쪽 발을 땅에서 뗀다. 그리고 조금 앞에 내려놓고 다른 쪽 발을 다시 뗀다. 그렇게 반복하면 앞으로 갈 수 있다. 지금에서야 그게 된다. 이곳에서... 

왜 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조차 오히려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생각이 깊어지면 또 무거워질 것 같아 무섭다.


그렇게..

다시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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