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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Jun 13. 2024

남편과의 사계절

우리 부부에게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계절이 있다. 사계절의 주기는 내 감정 기복의 주기와 함께 하는데, 남편과의 관계 때문에 감정 기복이 생기는 건지, 조울증과도 같은 주기적인 감정 기복이 관계를 흔드는 건지는 나도 사실 잘 모르겠다. 어쨌든 분명한 건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혹한기마다 우리는 점점 더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감사하게도 아름다운 사계절이 어김없이 계속되지만, 어쩌면 우리 부부에게는 결국 모든 것을 멸종시켜 버릴 냉혹한 빙하기가 찾아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늘 안고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이혼은 하지 않겠다는 대전제를 늘 분명히 선언하며 싸웠다. 그런 나와 달리 남편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이혼에 대한 의사를 물으며 차라리 그게 낫지 않느냐는 말을 꺼냈지만, 우리의 대안 중에 이혼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 부분 또한 남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었다. 사실 이혼에 대한 여지를 철저하게 배제했던 이유는 이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순간 나는 아마도 당장이라도 이혼을 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실행해 버릴 것 같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는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면에서 남자와 여자라는 성별만큼이나 정반대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해서일 수도 있고, 오랜 세월 마케팅 업종에 종사하며 인사이트를 발견하는 것이 몸에 배어서 일 수도 있다. 특히 사람과 말에 대해서는 더욱 허투루 보지 않는 편이다. 나 또한 아무 의미 없는 말은 하지 않는 편이다. 그래서 지키지 않을 약속은 잘하지 않으려 하며, 한번 뱉은 말은 부족하더라도 지키기 위해 진심을 다한다. 잘하는 것보다도 중요한 건 성의를 다하는 태도이다.


반면, 남편은 입에서 나오는 말 중 대부분에 ‘의도’라는 것이 없다. 뇌에서 생각을 거쳐 언어로 만들어진다기보다는 상황과 순간의 본능에 의해 그저 입에서 바로 내뱉어지는 소리인 것 같다. 여러 번 부탁한 일에 대해서도 지켜지지 않고, 내 말을 기억조차 잘하지 않는다. 가끔 남편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실컷 들려주었는데, 바로 다음 날 “너 그 얘기 알아?”라면서 어제 내가 했던 말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다시 들려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처음에는 '이 사람 뇌가 어떻게 됐나?', '장난하나?'라는 생각에 어이가 없었고, 때로는 진지한 얘기조차 그런 태도로 일관하면 '나를 무시하나?', '우습게 보나?' 그런 생각에 화가 났다.


결국은 내가 못 참고 화를 터뜨리게 되는데, 아무 뜻 없이 한 말에 왜 예민하게 발작하냐는 말이 되돌아온다. 그러면 그 순간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탁 놓아버리게 된다. 그렇게 또다시 우리 부부에게는 한동안의 혹한기가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우리의 첫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가 생각났다.


그와 나는 업계 모임에서 우연히 안면을 익힌 정도의 사이였다. 처음 알게 된 이후 거의 1년 동안 연락 한번 없이 지내던, 지인이라기도 뭐 한 사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업무 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의 차 내게 전화를 해왔던 것이었다. 난 별 도움을 주지 못 했고 짧은 통화를 끝으로 전화를 끊기 전 그가 내게 말했다.


남편 : “그래도 고마워. 언제 밥 한번 먹자.”


나 : ……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밥 먹을 사이는 아니지 않나'


남편 : “밥 먹자는데 왜 대답을 안 해? 나랑 밥 먹는 게 싫어?”


나 : “아… 아니야.. 먹자 밥”


사실 그때 그의 ‘밥 먹자’라는 말은 한국인들이 흔히 하는 큰 의미 없는 인사치레였다. 그리고 난 그의 말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두고 어색해하며 대답을 피했고, 그런 내게 남편은 오기반 관심반으로 우리의 만남이 실제로 이어지게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 자체가 서로의 다름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던 것이다.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알겠어. 네가 하는 모든 말은 아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그래서 이제 아무 의미 없는 너의 말에 상처받지도 화내지도 않을 거야.”


남편은 반색하며 대답했다.


“맞아. 바로 그거야. 내 말에 의미를 두지 마. 대신 중요한 얘기는 “이건 의미 있는 얘기”라고 하면서 말을 할게. 그렇지 않은 모든 말은 그냥 신경 쓰지 마.”


그렇게 다시… 우리의 봄이 찾아왔다.


우리의 봄은 계속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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