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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Jul 10. 2024

70점만큼만

아주 오래전 어느 마을에 모든 것을 다 잘 해내는 엄마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존재했으나 마치 어릴 적 동화 속 이야기만큼이나 뿌연 안갯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이다.


이십 대 중반 어느 주말에 나 홀로 기차를 타고 어느 낯선 도시에 도착했다.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는데 그때까지도 날씨에 맞게 옷을 입는 야무짐을 장착하지 못했던 철없는 아가씨는 짧은 미니스커트에 얇은 니트와 가디건만 예쁘게 걸친 차림이었다. 실오라기 사이사이로 살을 에이는 칼바람이 스며들며 결국 심한 감기 몸살로 몸져눕게 되었는데 집으로 갈 수도 없는 거리와 시간 속에 와있다는 게 문제였다. 친구의 친구네 집에서의 모임이었는데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해 이미 가정을 일구고 아이도 키우는 가정집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내 또래 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가정을 꾸린 사람이 주변에 없었기에 오면 안 될 곳에 온 것 같은 생경한 분위기였다. 처음 보는 낯선 가정집의 게스트룸 침대 안에 누워 아무리 오들오들 떨어도 올라가지 않는 체온과 씨름하며 외로운 밤을 지새우며 그날 처음 만난 어느 가족의 집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솔직히 어머님은 모든 것이 완벽하시잖아. 살림, 육아에 커리어와 인품까지… 솔직히 그건 어머님이 불가능한 것을 해내시는 거야~”


어린 며느리의 목소리였다.

이제와 생각하면 그건 동경인지, 질투인지, 시집살이에 대한 푸념이었을지… 실체에 대한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한 마디였을 뿐이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채 방문 넘어 누군가의 목소리로만 어렴풋이 전해 들은 그 전설 같은 이야기는, 그녀의 실체를 본 적도 없는 채로 막연히 동경하게 되는 환상을 만들어 냈다.


‘나도 완벽한 엄마가 되고 싶다.’


잘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유튜브를 보면 살림을 기가 막히게 하는 예쁘고 젊은 엄마들이 있다. 그녀들은 매일 새벽 단정한 차림새로 주방으로 출근해 앞치마를 맨다. 구수한 향의 건강차를 끓이며 집안에 온기를 데우고, 건강하고 정갈하게 아침 식사를 플레이팅 한다. 주방엔 이케아에서 본 인테리어 소품으로 모델 하우스처럼 꾸며져 있고, 맛깔스러운 집반찬과 식재료를 소분하여 냉장고에 각을 맞춰 착착착 정리해 둔다.


요즘 엄마들은 육아도 전문가 수준으로 한다. 갓난아기의 수면 교육부터 식사 습관, 놀이, 체험, 학습까지… 과목 별 교수법과 유명 교재, 학원 별 특장점까지 분석하여 줄줄 왼다. 나도 자녀교육에 대한 관심은 어떤 엄마보다 뒤지지 않지만 사실 난 딱히 무언가를 잘 알아보고 시켜준 적은 없는 엄마다. 그저 학기가 시작할 때마다 아이 손을 잡고 서점에 가 문제집 한 권씩을 사고 매일 조금씩 열심히 풀고 채점하고 설명해 주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필라테스든, 헬스든 뭐든 꾸준한 운동을 해야 한다는 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번씩 마음먹고 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게 다다. 어느새 야금야금 찌기 시작한 살은 끝도 없이 체중계의 숫자를 높여만 간다. 집에만 있다 보니 옷도 안 사 입는다. 편한 고무줄 단색 바지와 단색 티셔츠 몇 벌을 사놓고 돌려 입는다.


더더군다나 커리어는… 경력 단절 5년째에 접어든다. 그 사이 조금씩 다른 일을 해보려 하긴 했지만 커리어라고 할 수는 없다. 잘 나갔던 시절의 ‘원래 나의 일’과는 다시는 안 볼 듯이 의절한 지 오래다.


내가 잘 해내고 싶었던 모든 것들에 점수를 매겨 선을 연결하면 아마 애매한 크기의 육각형이 그려지지 않을까. 현재 내 일상은 모자랄 것도 없고, 딱히 큰 고난이 닥친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냥 내 삶이… 그저 그랬다.


SNS 속에는 예쁘고 행복한 것만 담긴다. 똑똑했던 친구들은 자기 사업체를 꾸렸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친구의 아이들은 티 없이 해맑고, 재능을 뽐내는 무대에 서거나, 영재원에 합격했다는 장면의 사진이 올라온다.


그러나 어느 집이나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각자의 말 못 할 고충을 담고 있다고 한다. 돈이 많은 집, 궁합이 잘 맞는 집, 똑똑하고 지위가 높은 집… 어느 집이나 예외가 없다. 어느 하나 뛰어난 부분이 있으면 나머지 부분에서 깎아 먹어 결국 평균 70점을 맞추기가 쉽지가 않다고. 그렇다면 심각한 과락이 있는 것보다는 골고루 70점을 맞는 게 그게 바로 완벽한 행복이지 않을까.


무얼 하나 하더라도 70점만큼만 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 내가 그렸던 계획에서 30점만큼 어긋나도, 가족에게 서운함이 20점만큼 피어나도, 지금의 내 모습이 겨우 40점 짜리 같아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일단 70점만큼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다 보면 결국,

70점짜리 육각형이 나를 행복하게 지켜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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