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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Jul 04. 2024

나는 나의 ‘화(火)’와 매일 싸운다

나약한 마음아, 반전을 보여줘

얼마 전 인사이드아웃이라는 영화를 너무 재미있게 봤다. 영화에서는 사람의 내면(인사이드)에 다양한 감정들이 본부에서 컨트롤하며 그 사람의 정서와 행동에 영향을 준다. 재미있는 점은 여러 감정들 중에 키를 잡고 있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인사이드 본부에도 '기쁨이'가 키를 쥐고 리드해 줬으면 좋겠지만, 아마도 나의 인사이드 대장을 맡고 있는 감정은 ‘버럭이’ 임에 틀림없다.


언제부턴가 마음속에 화가 많아졌다. 평생을 키워오시며 내 모습을 지켜봤던 엄마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볼 정도로 버럭 화를 낼 때가 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와 말투는 나의 트레이드마크였는데 요즘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쩌렁쩌렁 목청이 터져라 소리를 지른다. 회사에서 회의를 할 때도, 친구와 대화를 할 때도, 아이들을 케어하면서는 특히 더, 필요 이상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상대방으로부터 “왜 화를 내고 그래요~”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번 화가 나면 좀처럼 감정을 가라앉히기가 힘들었다. 표정 관리는 할 생각도 없었고, 노력해 본다 한들 안면마비가 온 것처럼 표정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아이들이 엄마에게 바라는 것은 딱 하나였다.

‘엄마가 화내지 않는 것’


아이들에게 말했다. “나도 화내고 싶지 않단다” 오죽하면 어떤 날은 풍선에 '화'라고 크게 적어 바늘로 펑펑 터뜨리는 놀이를 하며, 다시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고 소용없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오래된 분노조절장애는 대인기피증과도 연결되었다. 세상 모든 것이 삐딱하게 보이니 어딜 가서 누구를 만나 소통하는 것 자체가 피로로 느껴졌다. 피로를 넘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그들에게 화가 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동시에 타인이 나를 못마땅하게 여길만한 모든 가능성에 대해 수만 가지 상상의 나래를 펼쳐 지어내었다. 사실 별 뜻 없었을 누군가의 사소한 말들도 한 마디 한마디 다 뾰족한 가시가 되어 하나하나 다 가슴에 박혔다. 그 모든 말들이 가슴에 담겨서 어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그렇게 불안과 우울의 수위는 날로 높아만 갔고 이는 또 수면 장애로 이어졌다. 오만가지 생각과 부정적인 감정이 잠을 방해했다. 그런 나의 하루가 지루하고 무기력해 밤이면 혼자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잠에 들었다. 술을 마시다 보면 그나마 별 볼일 없는 하루에 유일한 낙을 주는 것 같아 마음이 풀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잠이 들면 결국 갈증으로 질 좋은 수면을 방해했고 다음 날 심한 몸살과 두통으로 축 늘어져 또다시 하루를 망치게 되는 악순환을 도돌이표처럼 매일 반복하며 살았다.


분노조절장애 + 대인기피증 + 수면장애 + 알코올사용장애까지… 내 상태에 대한 비공식적 자가진단은 그러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만했다. 그럼에도 세월은 무심히 잘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때부터 친했던 오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 : “OO아~ 뭐 해?”


나 : “응 나 도서관~ 맨날 책이나 읽으면서 지내~ 너는 퇴사했다는 얘기 들었어. 이제 좀 쉬려는 거야?”


친구 : “응 조금 쉬려고 했는데 너무 좋은 기회가 와서 나 이직했어!”


나 : “한 회사에서 20년이나 힘들게 일했는데 이 참에 좀 쉬지 그랬어~”


친구 : “나도 이번에 느꼈는데 나는 나의 일을 하고 성과를 내고 인정받아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 잠도 못 자고 너무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지금 이 일을 시작하게 돼서 나 너무 설레어. 꿈꾸던 일이었던 것 같아~”


친구는 꿈을 향해 달려갈 만반의 준비가 된 듯한 상기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친구 : “그래서 말인데 너 생각이 많이 나더라. 너도 원래 했던 분야로 돌아갈 생각 없어? 너도 일을 해야 행복할 것 같아. 야 애들은 금방 큰다~ 너도 너의 꿈을 위해 살아야지 왜 그러고 있는 거야~”


나 : “그게… 나는 세상이 무서워. 그때 일을 그만두면서 너무 많이 너덜너덜 해졌나 봐. 마음이 너무 힘들어~”


친구 : “야! 힘들면 힘을 내야지!”


나 : “아… 나도 예전엔 힘들면 힘을 내는 게 당연하지라고 말했던 사람인데, 그게 안 되는 걸 힘들다고 하는 거더라고… 마음에 큰 병이 있나 봐 ㅎㅎ”


친구 : “야 그래도 너무 아까워 나는 네가 이 일을 다시 했으면 좋겠어~”


반가웠던 친구와의 대화는, 나를 응원하지만 이해는 하지 못하는 친구에게 내가 왜 지금 이렇게 형편없는지 설득력 있는 핑계를 말하기 위해 애쓰는 방향으로 길을 잃고 있었다.


나 : “친구야 내 남편은… 나의 성공을 응원하지 않아…”


그 순간 전화기 너머로 건조하고 단호한 어조의 “예~ 그러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말을 하다 말고 멈칫하며 상황을 해석하려 했다.

친구의 ‘그러세요’는 아마도 통화 중인 친구 옆에서 말을 거는 제3의 인물에게 하는 말이었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나의 한심한 소리에 뱉어 낸 “예~ 그러세요~”라는 매정한 선긋기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친구는 그러고 나서 곧이어 “OO아~ 미안~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날 밤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밤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밤새도록 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며 신음했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분명 정상이 아니야. 이건 정도가 심해. 문제가 있어. 나 스스로 모른 척 버틴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더 이상 미루지 말고 가자. 정신과.


그날 내 멘탈은 바닥을 치기로 작정한 것이 분명했다. 세상에 등 돌리고 꼭꼭 숨어버린 내가 한심해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나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고 발걸음을 내디딜 에너지를 다시 불어넣기 위해 어디 그래 끝까지 가보라고 밀어 부친 듯했다.


그렇게 바닥 끝까지 무너져 내렸던 그날, 나는 과거의 나를 산산이 부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날부터 2주에 한 번씩 의사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매일 자기 전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한 알씩 복용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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