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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Apr 25. 2024

아기여도 큰 아들, 평생을 형으로 사는 아이

“어머니, 솔직히 누가 더 예쁘세요?”


큰 아이의 양육이 너무 어려워 찾은 심리상담센터에서 선생님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온화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은 마치 솔직히 털어놓으라는 추궁처럼 느껴졌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내 속으로 낳은 내 새끼들 중 누가 더 예쁜지 고르라는 질문 자체가 말이 되나라는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저는 솔직히 둘 다 너무 예뻐요.”


그런데도 상담 도중 선생님은 같은 질문을 두어 번 더 반복했다. 둘 다 똑같이 예쁘다는 내 말에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지만, 선생님은 왜 그 질문을 계속했을까. 내 대답은 진실이었을까. 답을 하는 순간의 내 표정과 눈동자는 어땠을까.




우리 큰 아들은 태어날 때부터 에너지가 넘쳤다. 모든 일에 호기심 넘치게 달려들었고, 열정이 넘쳤으며 절대 지치지 않았다. 보통 출산 예정일을 임신 40주로 계산하고 38주 미만부터 조산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38주가 되는 날 자정이 지나자마자 양수가 터지며 태어난 아이였다.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우렁찬 목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배고픔을 1초도 견디지 못했고, 졸려도 쉽사리 잠들지 못하고 매일 밤 몇 시간씩 안고 흔들며 자장가를 불러야 했다. 춥거나 덥거나 답답하거나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불편함에 대해 아이는 온몸과 마음을 다해 표출했다. 아이의 불편함의 원인을 빨리 캐치하고 해결하기 위해 늘 마음이 급했고 허둥대다 보면,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어쩌면 정신줄을 잘 잡는 것보다 그냥 놓아버리는 편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OO이(나)는 죽을 때까지 OO이(큰 아들)의 마음을 알 수 없을 거야”


지인을 통해 전해 들었던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대화 속에 내가 함께 있지 않았고 나와 그녀는 직접적으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기에 그 말의 맥락과 의도를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상당히 오랫동안 마음을 누르던 말이었다.


그녀가 말한 ‘내가 죽을 때까지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은 바로 ‘맏이의 마음’이었다. 나와 남편은 모두 둘째이자 막내이다. 우리 집 네 식구 중 맏이로 태어난 사람은 우리 첫째 아들 밖에 없다. 첫째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마음이라고 해버린다면, 평생을 첫째로 살아볼 수 없는 인생을 사는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한들, 안다고 주장할 수가 없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나는 애초에 태생적으로 아이를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는 엄마일 수밖에 없다.


태어나 첫 돌을 맞이하기도 전부터 아이는 ‘형아’가 되었다. 뱃속에 이미 동생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을 대면했던 2살 때부터 이 아이는 ‘아가’라는 자아보다 ‘형아’라는 자아가 더 많이 심어졌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형이기 때문에’ 부당하다고 느끼는 일은 만들지 않으려 애썼다. 형이니까 이해하거나 양보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형제이지만 공평하게 키우려고 노력했다. 애초에 공평함이라는 건 존재하기 어려운 데다가, 상대적 체감이라는 필터까지 거치면 더더욱 성립할 수 없는 것이 완벽한 공평함일진대, 아이를 양육하며 나는 이 공평함이라는 이슈에 지나치게 몰두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누가 봐도 형아 같은 형아’로 자라났다. 언제 어디서나 알뜰살뜰 동생을 챙기고 아껴주며 사랑을 표현했다. 어쩌면 동생을 ‘키운다’는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늘 주변을 살폈고 필요한 것을 먼저 챙겼다. 힘들거나 어렵거나 나서야 하는 모든 일은 당연한 듯 본인이 했다. 자기도 뒤뚱뒤뚱 걸으면서 동생 손을 잡고 데리고 다녔고, 바구니나 장난감 자동차에 동생을 태워 몇 시간이고 밀고 끌어주며 재밌는지 물어보며 뿌듯해했다. 내가 피곤해 자고 있으면 동생의 밥도 차려주는 아가였다.


아이는 엄마도 잘 챙겼다.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청소기를 돌려주고 빨래를 같이 갰다. 그런 아이에게 나도 힘이 들 때면 기대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퇴근 후 너덜너덜해져서 집에 돌아오면 아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의 회포를 풀었다. 하루는 갈수록 꼬여가는 회사 생활 중 나의 무리한 욕심으로 아끼던 직원 하나를 잃게 되어 많이 힘들었던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큰 한숨을 내쉬었더니 아이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응.. 엄마가 회사에서 잘못한 일이 있어.”


마주 앉아 심각하게 내 얘기를 듣던 아이가 답했다.


“나도 유치원에서 잘못할 때가 있어. 오늘도 ‘F’를 잘못 썼어. 근데 나는 괜찮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면 돼. 내일은 내가 지우개 빌려줄 테니까 꼭 가지고 가 엄마.”


다섯 살 아가에게 들었던 그날의 위로는 눈물이 핑 돌만큼 순수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여러 해가 지났지만 지금도 자책감에 짓눌릴 때면 이 말을 떠올리며 힘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우개 빌려줄 테니까 꼭 가지고 가.”




평생을 형으로 사는 아이.


사실 온갖 야무진 척은 혼자 다 해도 어설픔 투성이인 아이였다. 욕심 많고 성격이 급해 일을 그르치기 일쑤였고, 동생을 챙긴다고 정작 자기 일은 제대로 못 하는 일도 많았다. 등굣길 동생만 쳐다보며 가다가 자기 실내화 가방은 횡단보도 앞 길바닥에 내려놓은 채 빈손으로 털레털레 학교를 가기도 했다. 누군가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느낄 때의 노여움도 컸다.


세월이 갈수록 아이와 큰 소리가 나는 일이 많아졌다. 기대가 크고 기대는 마음이 큰 만큼 나도 모르게 아이에게 감정적으로 대했다. 아이의 서툰 행동을 고치는 데만 급급해 누구보다 따뜻한 이 아이의 마음은 외면한 채 지적만 앞세웠다. 엄마에게 항상 야단을 맞으며 아이는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엄마에게 누가 더 예쁘냐는 질문은 어쩌면 아이가 내게 묻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의 행동보다 마음을 먼저 봐주는 엄마가 되기로 다시 한번 다짐해 본다.


“아가야. 너는 형이어도 아가야. 아저씨가 돼도, 꼬부랑 할아버지가 되어도 나에게 너는 아가야. 세상에서 가장 마음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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