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를 낳고 몇 달 후 산후 검진 차 산부인과에 방문했을 때 주치의 선생님께서 가족계획에 대해 물으셨다. 서른이 넘은 결혼. 전부터 당연히 바랬던 아이이기에 첫째는 의논할 것도 없었는데, 둘째에 대해서는 한 번도 논의의 주제로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대로 '가족계획'은 결혼 후 꼭 의논을 통해 계획해야 할 문제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결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삶에 큰 변화가 생기는 일인데, 임신과 출산, 육아라는 대형 변화들을 너무 준비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변화가 휘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둘째는 엄두도 못 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는 하나만!’이라는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밤낮없이 일하고 애 키우며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그즈음은 남편과 가장 사이가 안 좋았던 시기이기도 했다. 결혼과 출산으로 나의 상황은 180도 변해있는 반면 내 마음은 여전히 싱글일 때처럼 자유롭고 싶었다.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엄마의 호르몬은 둔하디 둔했던 나를 초예민 맘으로 바꿔 놓았고 사소한 문제에도 날을 세워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결혼 후 출산을 하게 되면 바로 그 시점이 부부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는 지극히 일반적인 수순이라고 한다.
그런 중에 생긴 아이였다. 우리 둘찌는.
도대체 전쟁 같던 그 시절에, 언제 어떻게 이 세상에 생겨났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이다. 고등학교 동창들과 간만에 거하게 술을 마시고 헤어진 다음 날 아침에 알게 된 아이. 첫째 아이 때와 동일하게 회사 사무실 1층 조용한 화장실에서 두 줄의 임테기를 확인하고는,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얘들아, 어젯밤 우리 술자리에 한 명이 더 있었네.”
그날 밤 남편과 침실에 마주 앉아 소식을 전했다. 남편은 충격으로 굳은 얼굴을 미처 감추지도 못한 채 로봇 같은 말투로 답했다. 마치 옆집 여자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나 할만한 대사를....
“어…어… 축하해~”
그렇게 우리는 짧은 대화를 자연스럽게 마무리하는 데에 실패한 채 어색하게 잠자리에 들었다.
둘째 소식에 적잖이 놀란 사람들은 남편뿐만이 아니었다. 한번 더 임신하면 죽여버린다는 말을 농담이라고 하는 회사 사람들. 실질적으로 아이를 봐주시는 친정 엄마의 어두운 낯빛. 무엇보다 가장 당황했던 사람은 밤마다 좁은 드레스룸에 숨어 펑펑 울던 바로 나 자신이었다.
때로는 지나친 걱정이 오히려 안도를 가져다주기도 하는 것 같다. 다행히 신은 그렇게 매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한 아이를 한 집에 몰아서 주지는 않는다고... 여럿을 나으면 그중에 한 명 정도가 이상하다고 하는 어느 강사의 우스갯소리대로… 둘째 아이는 마치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 같은 정도의 느낌이었다.
둘째를 출산하던 날, 환복에 산전검사, 분만 준비를 채 마치기도 전에 나오려는 아이를 도로 밀어 넣으며 의사 선생님이 분만실에 뛰어 들어올 때까지 참아야 할 정도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태어난 아이를 받으신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만 낳으면 하루에 열두 명도 더 받겠네.”
남편은 분만이 시작되면 밖에서 대기하다가 탯줄을 자를 때 들어오기로 했었는데, 나가라고 하더니 바로 들어오라고 해서 무슨 상황인가 했다고 한다.
아이는 태어나면서 울지도 않았다. 호흡을 확인하기 위해 발바닥을 톡톡 건드리자 ‘에엥~’하고 잘 살아 있음을 알릴 뿐이었다. 자다 깨도, 배가 고파도 ‘에엥~’ 신호만 살짝 주고 분유를 타러 왔다 갔다 하는 엄마를 곁눈질로 쳐다보며 가만히 기다리는 아기였다.
첫째 아이를 키울 땐 밤마다 ‘섬집아기’ 노래를 백번도 넘게 부르며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2시간씩 바운스를 하며 온 동네를 돌아다녔는데, 모든 아이가 그렇게 잠드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들었을 땐 충격과 억울함이 몰려왔었다. 식당을 가도, 여행을 가도 어린 아기를 키우는 엄마는 먹을 수도 놀 수도 없이 아이를 달래느라 씨름하기가 보통인데… 우리 둘째는 손이 가는 일이 없었다. 이동 중엔 잠을 자고, 놀 땐 생긋생긋 웃고, 먹을 땐 기다려주고, 저녁이 되면 엄마 곁에서 조용히 기어 다니다 발 밑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가끔 ‘발로 키운 아이’가 있다는데 그런 아이가 둘째였다.
연년생 형제는 언제나 분쟁지역이지만, 그래도 둘째는 힘겹지가 않다. 엉엉 울다가도 빤히 쳐다보면 눈치를 보다 슬금슬금 금세 울음이 잦아든다. “다 울었어?”라고 물어보면 “네~” 그런다. “그럼 이제 갈까?”라고 하면 또다시 “네~” 하며 주섬주섬 일어나 손을 툭툭 털고 눈물을 쓱쓱 닦는다.
엄마가 형아에게 애정표현 하는 모습을 보고 샘이 나면, 조용히 불러 말한다. “나는 뽀뽀 두 번 해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며 “엄마의 머리카락 끝부터 그림자 끝까지”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아이.
가족 중 누군가 화가 나있거나 기분이 안 좋으면 어느새 찾아와 토닥여주는 이 작은 아이를 어쩌면 나머지 가족들이 의지하며 살아온 것 같기도 했다. 아이의 사랑 덕분에 마음이 풀리고 나면 늘 이렇게 말했다.
“쟤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어느 날은 친정 엄마도 이런 말을 했다.
“나중에 커서 속 썪이는 일 생겨도 얘는 좀 봐줘라~ 어릴 때 할 만큼 다 했다.”
일부러는 도저히 못했을 일.
그러나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
네가 처음 찾아왔을 때 나는 너무 무섭고 힘들었지만, 이제는 알고 있지.
너는 우리 가족에게 꼭 왔어야 하는 존재였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