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약 Sep 02. 2024

5년의 공백을 채워라

나는 경단녀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엄마들처럼 나 또한 엄마라는 이유로 커리어를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졌고, 나의 꿈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들며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고, 꿈꾸지 말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이 아팠고 좌절했지만,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된 나는 스스로를 탓하며 달라진 현실을 받아들이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이었다. 5년의 시간은.


눈 뜨면 달라지는 게 디지털 마케팅 업계인데 5년이나 쉬었으니, 왕년에 아무리 성공적인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다고 한들 지금의 내 공백이 얼마나 클지 끔찍하다. 과거의 성공과 그때의 역량, 그리고 긴 시간 동안 쌓여 온 신뢰로 그녀는 내게 당연한 듯 손을 내밀었고, 나 또한 묻지도 따지지 않고 그녀의 결정에 따라주었지만, 그녀도 나도 내 5년 간의 공백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게다가 문제는 퇴색된 지식뿐만이 아니다. 그로 인해 한없이 떨어진 자신감은 그나마 잘하던 일마저도 고장 난 듯 주춤대게 만들었다.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공부 밖에 없었다.


최신 마케팅 툴에 대한 스킬이나 매뉴얼을 읽어 본다. 

이런 건 현업에서 요구될 때 읽어 보면서 하면 그냥 할 수 있겠다.


마케팅 원론을 다시 들여다본다. 

원론은 원론일 뿐이라 해도, 원론에 대한 이해에 기반한 실전은 그렇지 않은 것과 천지 차이다. 역시, 원론은 진리다. 뭐가 됐든 기본은 알고 하자.


성공한 CEO의 자서전, 창업 도전기... 

그래, 다들 처음부터 뭔가 잘 알아서 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우여곡절을 겪으며 해나가는 것뿐이지. 일이란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게 아니야. 나도 할 수 있어.


강의를 듣는다.


챗지피티로 할 수 있는 게 이렇게 많다니. 새롭게 공부한 것 중 가장 눈이 휘둥그레지는 영역이다. 신입사원 뽑아서 가르치며 온종일 삽질을 반복하며 겨우 쓸만한 결과물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보다 챗지피티가 5분이면 더 나은 결과물을 가져온다. 힘들게 가르칠 필요도, 돈 주고 사람을 쓸 필요도 없다. 참 좋은 시대다.


원래 알았던 영역이지만 마케팅, 커머스 관련 강의를 듣는다. 생각보다 내가 일했을 때보다 업데이트된 내용이 별로 없다. 대행사나 매체사에서 근무하며 배운 것으로 적당한 내용의 강의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이 참 많구나. 내가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부분을 돈 주고 배우자니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래도 한 동안 잊고 지냈던 기본을 리마인드 하는 기분으로 쭉 들어본다.


어설픈 강사의 강의보다는 차라리 매체사나 솔루션 업체가 영업 목적으로 세미나를 여는 게 훨씬 더 얻을 게 많다. 결국 자기 매체에 광고를 하라거나 솔루션을 사용해 보라는 거지만, 요즘은 세상에 좋은 제품/서비스가 너무 많다. 꼭 내가 직접 잘하지 않더라도 그런 툴을 잘 쓰는 건 마케팅을 성공시키는 데에 큰 무기가 된다.


학생 때처럼 매일매일 공부를 하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갸우뚱댄다. 뭘 그렇게 읽고 보는지...


'엄마가 불안해서 그렇단다.'


스스로에 대한 불안함만이 아니다. 이런 나에 대해 불안해할지도 모를 그녀의 마음이 신경 쓰인다.

열심히 읽고 본 것을 글로 다시 정리 요약하고 내 인사이트까지 덧붙여 노트를 만든다. 그리고 그 내용을 그녀에게 공유한다. 지식을 공유하는 것도 있지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이렇게 노력하고 있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일을 하려면 끊임없이 공부하고, 공부한 것을 적용하고, 복기하고 개선하는 일을 절대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적어도 내 몸이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은 '일을 대하는 태도'이다. 그 태도가 결국 나를 원래의 상태로 잘 돌려놓으리라 믿어 본다. 생각보다 '좋은 건 누리고 싶으면서 노력은 하기 싫은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난 그런 사람들을 지극히 혐오한다. 난 내가 잘하고 싶은 크기 이상으로 노력할 것이다. 성과는 노력하는 사람이 내는 것이 맞다. 노력하지 않은 사람은 괜히 남의 성과를 탐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면 된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 얼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본래의 페이스를 되찾을 수 있을까.

'넌 할 수 있어' 

나를 북돋울 수 있는 건 오직 나뿐. 

스스로를 토닥이며 용기를 내어 본다.

이전 03화 동쪽에서 나타난 귀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