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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간약 Aug 26. 2024

동쪽에서 나타난 귀인

나와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를 준비하고 있는 그녀는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업인이다. 그녀는 이름이 알려진 이후, 빼어난 미모와 출중한 능력, 성숙한 인품으로 많은 기업의 총수들에게도 확고한 인상을 남겼다.


이름을 들으면 알만한 재벌가 오너가 그녀에게 꿀 같은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녀는 앞에 펼쳐진 다양한 선택지 앞에서 많은 시간 고민했다. 재벌가의 심복이 되어 소위 상류층 커뮤니티 속으로 깊숙이 들어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이 소유한 진짜 자기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손에 꼽히는 대기업의 높은 지위를 얻게 되면 든든한 백그라운드와 사회적 명성과 함께 그녀를 앞으로 '그들이 사는 세상'에 데려다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회사에 소속된 고용인의 목숨이 종국에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는 알 수가 없다. 아니, 현실의 대부분은 한 때 그들 곁에서 비슷한 지위를 누리는 듯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오너가의 전쟁 속에 온갖 더러운 꼴을 다 뒤집어쓰고 희생양이 되어 묻혀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자기 사업을 시작하는 건 어떨까. 잘하기만 한다면, 내가 키운만큼의 성공이 오롯이 내 것이 된다는 것.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결국 남 좋은 일을 시키게 되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20년 간 한 회사만 다녔던 직장인이 갑자기 세상에 나와 맨땅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는 건, 너무 막막하다. 당장 투자 자본을 끌어 모으기 위해, 난다 긴다 하는 인재들을 모셔오기 위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느라, 정작 비즈니스에 핵심 역량을 키우는 데에 집중할 시간이 모자라다. 아등바등해봤자 매달 인건비, 임대료 등 나가는 비용은 많고, 투자해야만 하는 비용과 기간에 비해 아웃풋을 기대하기까지는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그 성공의 크기 또한 불투명하다. 작은 규모로 시작할 수밖에 없는, 중소기업도 아닌 스타트업에 스펙이 짱짱한 지원자가 나타나는 일을 기적에 가깝다. 게다가 그들이 이 회사에 성장을 위해 목숨 바쳐 일한다는 건? 그건 그냥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면 된다.


퇴사를 결심하고 무지랭이처럼 회사에 앉아 허송세월을 보내던 어느 날, 땅딸막한 체구에 날카로운 눈빛, 화통한 육성을 가진 어느 사업가가 사무실로 찾아왔다.


"우리 사업이나 하나 합시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사업 제안 차 방문했던 어느 기업의 회장님이 회사 내부에서 부당함을 겪고 있는 그녀의 정황과 온갖 심란함을 뒤로 감춘 그녀의 눈빛을 캐치해 냈다.


"나중에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따로 만납시다."


 거침없는 화법과 빠꾸 없는 대범한 비즈니스를 펼쳐 온 그는 이미 자기 분야에서 엄청난 입지를 다져 놓은 어느 그룹의 회장님이었다. 거친 겉모습과는 달리 술, 담배도 일절 하지 않고, 업무 시간에만 200% 밀도 있게 일을 밀어붙이는 불도저 같은 스타일의 기업인이다. 대신 깔끔하게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 제대로 하는 일 없이 헛짓거리를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그날 부로 자리에서 치워진다.


우리가 힘들었던 건 일 외의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의심과 경계, 아첨과 거만, 비뚤어진 직업의식, 뒤틀린 인간에 대한 기준. 그 속에서 시들어가던 우리에게 '일만 할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매력적인 환경이기에 '거친 표현'은 전혀 대수롭지 않았다. 진짜 나를 아프게 하는 흉기에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 왔다.


이로서 우리가 계획했던 창업은 꽁냥꽁냥 버전이 아닌, 그룹사 산하에서 신규 법인을 설립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그 형태가 업데이트되었다. 거침없이 대차게 우리 이름을 걸고 이 세상에 나가기엔, 사실은 겁이 아직 많이 난다. 선뜻 도움이 되어 주겠다는 그가 있다면, 그리고 우리 또한 그에게 도움이 되어 줄 부분이 명확하다면, 경쟁력 있는 무기를 가지고 세상에 나갈 수 있다.


결국, 사회적 신분을 상승시키지도 100% 내 사업을 세우지도 않았지만,

재력과 인적/물적 인프라가 짱짱한 그의 그늘 아래서 정직한 땀방울만큼의 성공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그는 어쩌면 진정한 '동쪽에서 나타난 귀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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