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랜B 홈스쿨링 시작 그리고 새로운 진단명의 등장
미션 실패: 지구 학교 적응 프로젝트 종료
(ft. 내 멘탈도 함께 종료)
초2 공격형 ADHD 외계인 말안들인, 2025년 9월 1일 결국 지구의 교육기관에서 영광스럽게 퇴출당하기로 결정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사실 공주맨인 나는 생각보다 나 자신의 존재를 소중히 여기는 개체였던 것이다. 연일 계속된 외계인 관리 업무로 내 바이오 시스템이 "삐—삐—삐—"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고, 암일지도 모른다는 건강 검진 결과에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가 레드 존을 돌파하자 걷잡을 수 없이 이 꼬마 외계인이 미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2학기가 시작되고 매일 다시 'ADHD 외계인 관리모드'로 학교에 출격해서 말안들인의 핵폭발급 에너지 폭주를 진압하곤 했는데, 이 모든 일과가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기마냥 덧없게 느껴졌다. 학습 데이터 축적이나 사회성 프로그램 업그레이드 같은 건 꿈도 꾸지 말자. 말안들인의 시스템에는 '거부' 옵션밖에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다.
말안들인이 학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종일 자신의 셀프 초상화나 좋아하는 수중 생명체를 종합장에 열심히 스케치하는 것뿐이었다. 마치 지구 관찰 일지를 쓰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다 지구인 담임으로부터 주어지는 미션은 10분 남짓이면 우주 최고 속도로 클리어하는 것들이었는데, 이후에 지구인 동료들이 거북이 속도로 임무를 완료할 때까지 대기하는 것은 말안들인에게는 빅뱅부터 우주 종말까지의 시간과 같이 길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전투모드 ON
: 경쟁 감지 시 즉시 베르세르크 모드 돌입
그 외에 말안들인은 종종 경쟁 상황이 감지되면 "크와아아악!" 하며 사이어인 변신하듯 전투모드로 전환되곤 했다. 새롭게 처방받은 '아빌리파이'라는 신비한 진정 포션은 기존 '리스페리돈'보다는 약한 진정 효과가 있어 분노와 짜증 에너지를 줄여준다고 했는데, 말안들인의 ADHD급 강력한 외계 DNA 앞에서는 그냥 영양제 씹어먹는 수준으로 효과가 미미했다.
아빌리파이 2mg을 투여하고 지구 학교에 파견 보낸 6일 동안, 말안들인은 진정한 창의력을 발휘했다. 담임 지구인에게 '선생님노 빡침샘노'라는 획기적인 브레인랏 네이밍 센스를 선보이거나, 받아쓰기 오류율을 지적한 동료 지구인을 즉시 "원수 목록 1번"으로 등재하고 공격 태세에 돌입하려 했다. 아, 이 창의력을 다른 데 써봤으면...
최종 보스전: 급식실 대참사의 날
하지만 진짜 지구 학교에서 탈출하게 된 결정적 사건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날, 그 시각... '모기 사건'이다.
점심시간에 말안들인이 지구 곤충계의 뱀파이어인 '모기'에게 생체 공격을 당했다며 지구 학교의 급식 시설을 마치 고질라가 도쿄를 습격하듯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이다. 고주파 울음소리를 발산하고 테이블 때리기, 숟가락 던지기 등 풀코스 파괴 행동을 개시하여 담임 교육자나 상급 관리자가 긴급 출동해도 도무지 말안들인의 전투모드를 해제할 수 없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학년 때부터 학교에서 공인한 앙숙인 또 다른 공격형 외계인 (역시 ADHD 말안들인)이 “웃기다. 깔깔깔-”이라며 옆에서 말안들인을 비웃고 간 것이 말안들인의 분노 엔진에 고옥탄 연료를 부었다. 완전한 핵융합 반응이었다. 그날 이후 말안들인은 무려 72시간 동안 그 적대 세력 외계인을 추격하며 복수 미션을 수행했다.
결국 다시 원점. 그동안 "우리 외계인이 조금씩 지구에 적응하고 있어!"라는 나의 희망찬 믿음이 타이타닉호처럼 산산이 침몰하자 끝없는 절망 바이러스가 내 바이오시스템을 해킹했다. 내 노력 투입량과 말안들인의 치료율 상승 그래프가 전혀 비례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의료진 상담: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그즈음 나는 내가 암일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건강 업데이트를 받고 갑자기 현자타임이 왔다. 나를 더 아끼기로 결정했다. '복세편살 나씨나길' - 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 나는 씨X 나만의 길을 개척한다!
급식실 대참사의 그날 말안들인을 학교에서 긴급 회수하고 나는 담임 교육자에게 "죄송합니다만 저희 외계인은 이제 지구 학교와 계약 해지하겠습니다"라는 정중한 통보를 했다.
며칠 뒤 지구 교육청 고위 관계자들(교감, 교무부장, 담임교사)과의 긴급 정상회담이 열렸다. 초등학교는 의무교육으로 사실 '자퇴'라는 개념이 없다고 한다. 뭐야, 감옥인가? 그러기에 말안들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선택지 A: 학업중단숙려제를 7주간 사용하고 무단 결석을 약 50일 지속해서 2학년을 어떻게든 수료하고 3학년으로 진급하기. (소극적 탈출법)
선택지 B: 정원외관리로 넘어가고 3학년 진급의 기회도 포기하기. (완전 단절법)
나는 말안들인을 위해 3학년 진급의 기회는 남겨두기로 했다. 혹시 남은 6개월 동안 말안들인이 기적적으로 개과천선하여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하게 업그레이드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물론 확률은 로또 1등과 비슷하지만) 학교로의 복귀는 가장 마지막, 그러니까 정말정말정말 마지막 선택지로 남겨놓을 것이다.
홈스쿨링의 놀라운 효율성
(왜 진작 이렇게 안 했을까...)
사실 나는 말안들인이 학교를 가지 않는 지금의 일상이 매우 매우 매우 마음에 든다. 아니, 사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에 보내는 동안 말안들인은 그야말로 귀중한 시간 리소스를 우주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었다. 이는 말안들인 외에 추가로 지구인 영유아 두 명의 24시간 케어매니저인 나에게는 엄청난 손실이었다. 말안들인은 학교에서 학습 데이터 축적도 0%, 영양 공급도 50% 미만으로 완료하고 귀환했다. 따라서 홈 베이스에 복귀 후 다시 말안들인에게 영양을 재공급하고 학습 프로그램도 처음부터 재실행해야 했다. 이게 뭔 이중고인가.
게다가 콘서타 약빨이 가장 완벽한 황금시간(오전 9시~12시)은 학교에서 허공에 날려 보내고, 집에서 오후에 약발이 떨어진 상태로 다시 공부하는 시스템은 그야말로 비효율의 극치였다. 마치 페라리로 주차장에서 뱅뱅 돌고, 자전거로 고속도로 달리는 격이었다.
그렇다고 공교육에서 제공되는 교육의 질이나 급식 등 부가적인 서비스가 말안들인을 무릎 꿇고 빌면서까지 적응시킬 정도로 훌륭한 것도 아니었다. 며칠 함께 지구 학교애 언더커버로 잠입수사하며 지켜본 결과, 학교 수업 진도는 대부분의 지구인 아이들에게 '유치원생이 구구단 외우는' 수준으로 쉬워 보였다. 벌써 3학년 수학을 정복했다고 자랑하는 어린 지구인 천재들도 다수 발견되는 것을 보아 학교 수업은 그냥 '복습을 위한 복습'에 지나지 않았다.
급식 서비스는... 아, 이건 정말 할 말이 많다. 어느 날의 급식 메뉴를 공개하자면 "깍두기, 새우튀김, 떡볶이, 밥, 오렌지주스"였다. 이게 균형 잡힌 식단인가? 말안들인은 매운 화학물질(고춧가루)은 외계인 체질상 섭취 불가하고, 오렌지주스도 "너무 달아서 이빨이 녹을 것 같다"며 거부한다. 결국 새우튀김과 밥만 픽픽 찍어 먹고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통행. 메뉴의 다양성을 차치하고도 급식의 퀄리티가 딱히 "와, 이거 먹으려고 학교 가야겠다!" 할 수준은 아니었다. 신선한 식재료로 정성스럽게 조리한 음식보다 가공식품이나 편의점 도시락 수준의 시판 제품이 급식으로 제공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전혀 아쉬움 없이 지구 학교를 쿨하게 졸업(?)할 수 있었다.
맞춤형 홈스쿨링: 외계인 맞춤 교육과정 개발
홈스쿨링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지만 말안들인은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훨씬 여유롭고 안정적인 라이프 사이클을 유지하고 있다. 그동안 밀렸던 과학실험(레인보우 농도탑 만들기, 향기 폭탄 실험 등등)도 매일 미친 듯이 즐기면서 수행할 수 있고, 가장 싫어하는 수학 연산도 오전 골든타임에 "어? 이거 생각보다 쉽네?" 하며 술술 완료하고 있다.
다시 오전 시간에 북미 원어민 교육자들과 화상영어도 재개했다. "Hello, how are you?" "I'm fine, thank you!"를 넘어서 이제는 "My favorite fish is betta! I have lots and lots of fish in my fish tank.”까지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국어는 초등학교용 경제신문을 읽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엄마, 매출이 뭐야?"라고 질문하기도 한다. 체육은 수영(물고기와 교감하기)과 필라테스(유연성 업그레이드)로 대체했다.
학원을 가지 않는 날은 한 살배기 지구인 동생들과 레슬링으로 실전 사회성 훈련을 하거나 좋아하는 과학도서를 읽고 비주얼 아트를 창작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그 와중에 분노 발작이나 "나는 복수할 것이다" 같은 악역 다크모드로 전환되는 일은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수업을 거부하거나 "공부는 지구인들이나 하는 거야!"라며 반항하는 일도 없다. 기적이다, 기적!
글로벌 교육 네트워크 연결:
미국 2nd Grade 진출 프로젝트
나는 말안들인을 위한 플랜 B도 이미 준비해 놨다. 말안들인을 미국의 온라인 홈스쿨링 학교에 등록한 것이다. 미국은 정규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홈스쿨링 제도가 NASA급으로 잘 발달되어 있고, 홈스쿨링으로도 당당히 공인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 자유의 나라답다!
그동안 말안들인과 칸 아카데미 같은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베타테스트해 보았는데, 꽤나 잘 이해하고 "다음 단계로 진격하자!"며 적극적으로 진도를 따라왔다. 샘플 수업으로 미리 온라인 홈스쿨링을 체험했을 때도 미국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영어를 "이거 너무 쉬운데?"라며 무리 없이 처리하였기에, 미국 초등학교 교육 프로그램도 충분히 정복 가능할 것 같았다.
주치의 긴급 상담:
새로운 진단명의 등장 (또?)
학교를 화려하게 그만두고 일주일 후 정신과 주치의를 만났다. 나는 그간의 대형사건들을 브리핑했다. 학교에서 몇 번이고 "복수는 나의 것"이라며 탈주했던 사건, 모기 한 마리 때문에 괴성을 발산하며 급식실을 폐허로 만든 사건 등등. 그리고 2학년은 쿨하게 휴학하기로 했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주치의가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오히려 잘됐네요! 한 학기 쉰다고 인생 망하는 거 아니잖아요? 솔직히 아이에게 딱 맞는 약을 못 찾아서 저도 스트레스였어요.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증상을 빨리 잡으려고 '일단 이거라도' 땜빵식(?)으로 급하게 처방했던 감이 있거든요. 이제 여유 있게 6개월 동안 천천히 아이에게 맞는 약을 찾아봅시다."
그런데 여기서 폭탄 발언이 나왔다. 주치의가 말안들인이 '조증'인 것 같다는 충격적인 정보를 업데이트한 것이다.
ADHD 화학 치료제를 A부터 Z까지 다 시도해 봤지만 증상이 잘 억제되지 않는 것이 그 근거였다고. 지난번에는 "우울증 의심"이라더니 이번에는 "조증"이라고? 진단명이 이렇게 아이돌 콘셉트 변경하듯 쉽게 바뀌는 건가?
정말 우리 말안들인이 지구의 최고 정신과 의사들도 "이건 뭐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우주급 희귀종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외계인이 맞긴 맞나 보다.
약물 조합 재설정: 화학실험실 가동
오전에 투여하는 아빌리파이는 5mg으로 레벨업되었고, 저녁에 투여하는 리스페리돈 3mg은 현 상태 유지로 결정 났다. 물론 오전에 복용하는 주력 약물 콘서타 27mg도 그대로 유지. 대신 학교 수업 전용 집중력 부스터였던 페니드 5mg은 "이제 필요 없으니까" 하며 과감하게 퇴출시켰다.
나는 부작용을 걱정해서 진정 관련 화학물질을 줄이고 싶었는데, 오히려 지구인 의사는 "혹시 학교 복귀를 대비해서" 증량을 제안했다. 아니, 선생님! 우리는 학교 복귀 따위는 당분간 생각도 안 하고 있어요!
글쎄다. 이번 약물 조합도 말안들인의 강력한 외계 체질에 효과가 미미하다면 또 다른 의료기관을 탐색해보아야 하나. 동네의 소아정신과는 이미 한 번씩 다 순회했는데... 이제 서울 전체를 정복해야 하나? 참 험난한 여정이다.
결론: 외계인 양육은 정말 어렵다. 하지만 지구 학교가 답이 아니라면, 우리만의 우주선에서 자유롭게 항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복세편살, 나씨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