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면 장화를 신고 신나게 물웅덩이로 뛰어드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이크 바지에 다 튀잖아~!" 엄마의 목소리는 빗소리와 함께 흩어져 버린다.
그래 지금 신나게 뛰려무나. 언젠가는 비가 오는 날 꼼짝도 하기 싫어지는 나이가 될 테니. 이 순간의 흙 섞인 빗물냄새, 웃음꽃핀 형제의 얼굴, 잔소리하는 엄마의 목소리 잘 기억해 두렴. 언젠가 외로워진 너에게 촉촉한 위로가 되어 줄 테니.
비가 오면 하고 싶은 일
남편에게 아이들 등교, 등원 맡기고집에서 여유롭게 차 한잔 마시기.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하나다. 비 많이 오는 날 아이들 손잡고 힘들게 걷지 않는 것.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가 억수로 많이 오는 날엔 남편이 출장을 간다.
내일 아들의 생일인데, 비가 하루종일 온단다. 내일은 생일선물로 아빠가 등 하교 좀 시켜줬으면. 물론 비가 오는 날 외에 더운 날도 추운 날도 아무것도 아닌 날도 남편이 데려다주면 좋겠다.
엄마와 비
오늘은 첫째의 생일이다. 축하인지 위로인지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있다. 아이는 새찬 빗소리에 걱정이 되었는지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다. 비에 옷이 젖는 게 싫다는 아이.
다행히 아빠가 등교를 도와줄 수 있는 날이라 엄마도 한시름 놓았다. 어르고 달래어 학교에 보낸 후 조용히 글을 써본다. 내 삶의 비는 언제쯤 그치는 것일까 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며.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시작된 비는 나를 조금씩 적시더니 어느새 홍수가 되어 넘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게 나를 이리저리 쓸고 갔다.
그 비는 우울이었다. 비가 그치고 맑은 날이 와도 내 몸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르지 않았다. 영원히 우기일 것만 같은 그런 느낌. 쏟아지는 비를 막아보려 온 힘을 다했지만. 결국 댐이 무너지듯 내 삶은 무너졌다.
내가 무너지자 아이들도 넘어져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고 싶었지만 나를 채우고 있던 감정의 족쇄는 나를 더 가라앉게 할 뿐이었다.
오히려 내 손을 잡고 나를 건져주려 하는 아이들까지 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SOS. 결국 세상에 구조요청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까지 다 잠기고 나서야 혼자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제발 비 좀 그치게 해 주세요.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 지 1년 반. 나는 지금 무지개를 기다린다. 비가 내리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무지개가 뜬다는 사실을 안다. 머리로만 아는 건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끄덕인다. 그래 비가 그치면 무지개가 뜰 거야.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도, 세차게 쏟아붓고 사라지는 소나기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장마까지 다 겪어보고 나니 알겠더라. 비가 내리는 것을 괴로워만 할 것인지, 그냥 덤덤하게 '비가 오는구나'하며 피할 곳을 찾을 것인지는 나의 선택이란 걸.
이젠 우울이 와도 괴롭지 않다. '왔구나, 난 괜찮아. 잠시 쉬었다 가'라고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경험이라는 우산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
그대는 내 머리 위에 우산
그대는 내 머리 위에 우산
어깨 위에 차가운 비 내리는 밤
내 곁에 그대가 습관이 돼버린 나
나 그대 없이는 안 돼요
내가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을 때 묵묵히 내 옆에 있어준 사람이 있다. 나의 남편. 매일 남편이 아니라 남의 편이라고 구박하고, 서운하다, 힘들다 울고 소리쳐도 폭우처럼 쏟아지는 내 마음의 비를 같이 맞아준 남편.
그대도 남편이 처음이어서,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아내는 처음이어서 많이 힘들었겠소. 내 우울의 비를 막아줄 우산 하나 없이 그대도 많이 젖었을 텐데, 묵묵히 곁을 지켜주어서 고맙소.
이제 내가 우산 하나 장만했으니 같이 쓰고 갑시다. 앞으로도 비는 우리를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한 우산 속에 들어와 있으니 참 따뜻하구려. 이제 아이들이 혼자 우산을 쓰고 걸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손 꼭 잡고 걸어 봅시다. 무지개를 찾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