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
임시 광복절이 생겼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쉬어야 한다는 걸
몸도 마음도 경고하고 있었다.
그놈의 정이 무섭다고
팀원의 권유 아닌 권유에 일정이 미뤄졌다.
회사에 통보한 퇴사일보다
1달간의 연장 근무를 마치고
약 5년간의 회사 생활을 시원섭섭하게 정리했다.
흰 백지였다.
무엇을 해보겠다거나
구체적인 계획 따윈 없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구구절절한 사연이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건 아니다.
복잡하고 싶지 않았고 구차한 이유로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어쩌다 보니' 쉬게 되었다.
늘어진 엿가락 마냥
목 소매가 추욱 늘어난
조금은 빛바랜 하얀 면티가 OOTD였고
밥솥과 물아일체인 누룽지처럼
방바닥과 뜨거운 스킨십을 나누는
낯부끄러운 자세가 가장 격한 홈트였으며
쌀밥은커녕
그 흔한 김치 반찬도 유산균에게 양보하는
배민과 요기요의 노예,
칼로리 폭격 메뉴들이 나를 위한 밀키트였고
게으름이 나요, 내가 게으름인
대표곡이 'The Lazy Song'인
생활 기믹 프리스타일 래퍼가 되었다.
무작정 쉬기로 결정한 그날부터.
일상은 평범하고 단조로웠다.
듣지 못했던 좋아하는 가수들의 음악들을 찾아 듣고
평소 보지 못했던 드라마와 영화를 찾아보고
데코용으로 책장에 쌓여있던 책들을 찬찬히 읽어봤다.
언뜻 보면 난 여행 중이었다.
마치 꿈꾸던 뉴욕 여행을 하는 중인 것 마냥
남들이 일어나 출근하고 움직일 때
쥐 죽은 마냥 잠들고
피곤한 일상을 주변 사람들이 마무리할 때
꿈뻑꿈뻑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뒤 바뀐 나만의 '시차' 여행 중
문득 베란다 밖을 바라보니
콘크리트 건물로 둘러 쌓인 풍경에
답답함을 느꼈다.
진짜 뉴욕으로 떠나지는 못하지만
이 단조롭고 답답한 일상에
새로움을 더하고 싶었다.
그래서 떠났다.
장소는 짐짓 마음속으로 정해 놓았다.
평소 가보고 싶어 북마크를 꾸욱 눌러놓았던
제주의 고즈넉한 북스테이 숙소
여행을 가기까지 한 달의 고민
일주일간의 일정을 위한 짐을 꾸리는데 30분
그 외 숙소와 교통편을 정하는 데에는 20분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딱히 계획할 일정은 없었다.
떠나는 게 목적이었고
달라지는 게 바람이었는데
왠지 꿀리는 데로 하고 싶었다.
마치 남들과 다른 '시차'로 살아왔던 것처럼
남들에게 특별하다고 할 수 없는 변화
제주로 떠난 나는 아침 '조깅'을 했다.
왜냐고?
내가 하기 싫어하던걸 해보면 좋겠다고
다짐했으니까
바쁜 일상에서 아침밥을 잠에 양보하는데
아침 조깅은 사치기도 했었다.
인생 첫 아침의 조깅은
약간 바람이 불어오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1월의 어느 날
조용히 숙소를 빠져나와
익숙하지 않은 투박한 발걸음을 떼 보았다.
숨이 차 멈추고 싶을 때까지 달리다가
거칠고 비릿한 숨을 들이켜고 내셔 보고는
체력이 국력이라면 난 최빈국이겠다고 느꼈다.
제주 특유의 화강암 동네길을 찬찬히 달리고
자기 계절이라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한라봉의 은은한 내음도 맡으며
이게 정말 소확행이 아닐까 싶었다.
동네 몇 바퀴를 달리는 동안
숙소 강아지는 나와 함께 해주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만의 경주는 강아지의 승리.
숙소 앞 패배를 인정하는 머리 쓰담쓰담으로
소소하지만 특별한 첫 '조깅'은 마무리되었다.
숙소로 들어와 기분 좋은 뻐근함을
시원한 샤워로 털어내며 문득 든 생각.
무기력한 일상에 지치고 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 번아웃의 이유는 나였다는 걸
정말 마음만 조금 다르게 먹어
시도한 이 아침 조깅처럼
내가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려고 아등바등하지 말고
조금만 옆으로 옮겨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