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싱클레어 #3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데미안> 가운데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연애를 했다. 모든 만남은 저마다의 의미가 있었지만 모든 순간이 좋았던 건 아니다. 후회스러운 만남도 있고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순간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세 번의 사랑을 했다.
열다섯이었다.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H였다. H는 키가 크고 피부가 흰 친구였다.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던 코흘리개 남자애들과 달리 그에게선 남자의 분위기가 풍겼다. 그를 쳐다보는 시선의 시간이 쌓일수록 그에 대한 나의 감정도 깊어졌다.
어느 때에 H가 알았다.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하지만 H는 나를 친구 이상으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선을 긋지도 그렇다고 나와 가까워지지도 않은 평행의 상태를 유지했다. 틈을 주면서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그의 태도에 혼란스러웠고 그러면서 점점 내 감정에 집착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자, 나는 스스로를 얕잡게 보게 되었다. 작은 키, 퉁퉁한 몸, 둥글넓적한 얼굴, 찢어진 눈과 낮은 코, 쓸 데 없이 큰 입. 못생김은 친구를 사귀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이의 마음을 얻는 데는 장애물이었다. 내가 조금만 더 예뻤다면 H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의미 없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내 친구는 내게 물었다.
"도대체 가가 왜 좋은데?"
친구에게 H는 별 볼 일 없는 남자애였지만 내게는 멋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겐 내가 좋아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연예인보다 가깝고 현실적인 그 무엇. 중학생 소녀에게 짝사랑은 그 시기에 꼭 해야 하는, 성장의 징표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남들처럼 평범한 사춘기 소녀가 되고 싶었고 남들과 같은 그 특별한 감정에 집착했던 것도 같다. 그렇지만 H를 많이 좋아했던 건 정말 사실이었다.
내 첫사랑이 여중생의 성장 열병과 같은 것이라면 두 번째는 조금 더 현실적이고 지독하고 한숨이 절로 나오는 그런, 스무 살의 치기 같은 것이다.
K는 학과 동기였다. 술을 마시며 친해졌다. 내가 술에 취해 기억을 못 하는 술자리에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K는 그런 나를 친구로, 사람으로, 그리고 여자로 보았고 나는 그런 그가 싫지 않았다. CC가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CC 답게 금세 유명해졌다. 내 친구들은 나와 K의 관계를 '지독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렇게 수천 번은 싸웠다. 수십 번 헤어졌고 다시 수백의 날들을 만났다. 내가 바람을 펴서 K를 힘들게 한 적도 있고 K가 바람을 펴서 나를 힘들게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K의 옆을 떠날 수 없었고 그 역시 나를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집착했다. 그가 어떤 사람인 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나를 좋아해 주는 멀쩡한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아주 많이 그에게 기생했다. 그래서였을까. 언젠가부터 K는 나보다 친구를 우선시했다. 나를 피곤하게 여겼다.
추운 겨울이었다. 나와 K는 버스정류장 앞에서 싸웠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K를 쥐 잡듯 잡고 있었고 K는 미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K는 나를 달래지 않았다. 그건 나만 아는 그 사람의 태도에서 느껴졌다. 결국 나는 또 헤어지자고 말했다. 당연히 친구에게 가지 않고 내 곁을 지키며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버스를 타고 친구에게로 갔다. 충격이었다. 한 번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였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의 우선에서 완벽히 밀려났다는 것, 아니 더 이상 나라는 존재가 필요 없다는 것, 버려진다는 것, 그것은 힘든 일이었다. 내 친엄마가 나를 버리고 간 것처럼, 그는 어쩔 수 없었다며 나를 그 자리에 남겨두고는 가버렸다.
나와 K의 연애를 힘들어하던 친한 언니가 나를 데리러 왔다. 울고 있는 나를 일으켜 따뜻한 차를 먹이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나는 한동안 그 언니의 집에서 머물렀다.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자꾸만 공허해지고 그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 자꾸 눈물이 흘러 집에서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그 겨울, 나는 이별 다이어트를 혹독히 하고 새로운 연애를 꿈꿨지만 나는 다시 K와 이어졌다. 어느 순간 K는 다시 나를 필요로 했고, 나 역시 K에게 남은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3년을 더 만났다. 나는 그와 만나는 많은 순간에 그와 헤어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자꾸만 나를 그의 곁으로 밀어갔고, 나는 한숨을 쉬면서도 그를 만났다. 나와 K는 오랜 습관 같은 관계였다. 내가 그와 완전히 떨어질 수 있었던 건 학교와 친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일에 매달리면서였다. 일이라는 존재, 사회적 인정이라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서야 나는 그에게서, 그는 나에게서 분리되었다.
2013년 1월 기내용 캐리어 하나를 끌고 서울에 정착해 1년간 지독한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누구든 만나고 싶었지만 사람의 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맺어지거나 이어지는 건 아니었다. 이제는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겠다, 나의 삶을 살겠다 다짐하던 2013년의 12월 마지막 주 C를 만났다.
누군가가 의도한 만남이 아니었고 의도된 자리도 아니었다. 우린 그저 공연기획을 하는 지인의 부탁으로 자리를 메우러 갔었고, 미안한 마음에 이어진 치맥 자리에서 서로를 알아갔다. 8명이 한 테이블에 앉았는데 C는 나와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상하게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C 역시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다. 나는 C가 내게 연락을 해올 것이라고 예감했고, 그 밤 정말로 C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날부터 우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카톡을 주고받았고 매주 만났고, 매일 만나기도 했다. 그리고 3번째 데이트가 끝나고 우린 연인이 되었다. 누가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서로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 C가 지금의 남편이다.
그는 참 이상한 사람이었다. 내가 아무리 화를 내고 아무리 짜증을 내도, 내게 화내지 않았다. 가끔 짜증을 낸 적은 있어도 내가 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2014년 나는 숙명여대 근처에, 그는 광운대학교 근처에 살았는데 언제나 헤어질 땐 나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심지어 우리가 광운대 근처에서 데이트를 한 날에도. 그는 내게 미친 사람처럼 나를 좋아하면서도 자신의 일을 놓지 않았다. 나를 만나거나 자신의 공부를 하거나, 그 둘 하나에 늘 빠져 있었다. 나는 그런 그가 참 좋다.
C와 1년가량 만났을 때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C가 없으면 죽을 것 같아. 진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의지하고 있어."
내 친구는 그 말을 싫어했다. 친구에게 나는 언제나 똑똑하고 당당한 여성, 자신의 길을 걷는 여성으로 보였는데 그런 멋진 친구가 이상한 남자에게 의지한다는 게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야. 네가 나를 그렇게 멋진 존재로 보는 줄은 몰랐는데 사실 난 진짜 보잘것없거든. 난 언제나 사랑받고 싶어 했어.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고. 나는 내 길을 개척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 그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근데 그 평범한 게 나한테는 너무 어려워서 그냥 특별난 척을 했던 거야. 이제껏 내가 너와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줬던 건 그저 내 약함을 숨기기 위한 가면들에 불과했어.'
C는 내가 의지하기에 완벽한 사람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에게 의지했지만 그는 한 번도 나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이렇게 말했다.
"미야는 아무것도 안 해도 너무 예뻐요. 사랑스러워."
"미야가 하기 싫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돼요. 내가 할게요."
"미야는 존재 자체로도 충분해요."
"미야, 너무 멋있어요. 대단해요!"
내 부모도 내게 해주지 않았던 말. 내 부모도 자신이 힘들다며 밀어낸 나를, 그가 위로했고 안아주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7살 꼬마가 되었다. 울고 웃고 떠들고 귀여운 척하고, 꿈을 말하고 실패에 좌절하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밉다고 소리치고. 가끔은 그를 경쟁 상대를 삼기도 했는데, 그는 늘 그런 나를 귀엽게 봤다.
C는 나의 전부다. 안나 카레니나에게 찾아온 브론스키 같은 존재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의지하지만 그래서 무섭다. 그라는 존재가 사라지면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그라는 존재가 휘청댈 때 내가 그를 받쳐줄 수 있을까. 자꾸만 무서워졌다.
나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C도 좋지만 이제는 나 스스로 버틸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의 노력 없이 스스로 온전히 살아가지 못한다면 나는 또 언제고 나라는 이유로 주저앉고 말 테니까.
이제는 겁먹지 않고 비겁하게 숨지 않고 당당히 나를 보려는 노력을 해야 했다.
Cover Image. Photo by JD Mason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