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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초 May 08. 2019

장을 나누긴 한 날

20190506

앞서 드린 엄마나 큰언니의 경우에는 막장을 담을 적당한 크기의 재사용 통을 찾는 것이 최우선이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어제 동서에게 한 주먹 덜어 주고 돌아와 드는 생각. '좀 더 예쁜 통에 담아서 줄 걸'
막장에 대한 간단한 자기소개서도 라벨로 만들어 붙이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먹는 것이니까 재료에 대한 소개 정도는 정확하게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원재료명, 발효기간, 유효기간, 발효 장소, 보관방법 등을 쓰고, 내다 팔 것은 아니지만 막장의 이름도 지어 붙였다. 친구들의 반응을 상상하면서 자기소개서에 쓸 내용을 쓰고, 항아리 사진을 붙이고, 이름을 짓는 일은 아주 즐거웠다. 

무엇보다 제품의 생산부터 마지막 단계까지 모든 것이 내 손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기분은 아주 특별했다. 과정 자체가 놀이처럼 즐거웠다. 당연히 라벨에 쓸 내용은 순식간에 써졌다. 한글 말곤 쓸 줄 아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흑백의 밋밋한 라벨이 완성되긴 했지만, 막장 나누기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다면 배워서라도 더 멋있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막장을 받아 든 첫 번째  친구는 노안이 와서 카톡도 자주 하지 않는 친구이다. 막장을 둘러보더니 집에 가서 휴대폰으로 찍어서 확대해가면서 찬찬히 보겠다고 말했다.
안경을 쓰지만 다초점으로 바꿔야 하는 두 번째 친구는 아예 안 읽은 건지 읽다 만 건지 들여다보긴 했지만 별 말이 없었다.

안경도 안 쓰고 그런대로 시력이 양호한 세 번째 친구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읽긴 했지만,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최대한 큰 글씨로 했지만 500그램짜리 통에 붙일 수 있는 큰 글씨에는 한계가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면서 읽은 친구가 뚜껑을 열어 맛을 보긴 했는데, 집에 갈 무렵에야 어렵게 말을 꺼냈다.
"먹고 나서 맛이 길게 남지를 않네."
"...?"

친구들이 읽을 수 없는 작은 글씨의 라벨을 붙인 건 내 잘못이다. 그들의 리액션을 기대한 건 내 욕심이다.  
만들어 본 음식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공유하는 것까지가 장 나누기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과 달리, 그런 제안이 강요로 느껴진 친구도 있었다.
" 오늘은 술 마셔서 음식 못해. 그리고 시댁에서 준 쑥국이 김치냉장고 한가득이야."

깨달았다. 

아~~  내가 칭찬받고 싶었구나.
호들갑스러운 반응을 기대했구나.
이 무덤덤한 장 나누기가 내게 충격이었구나.

나이를 먹어 좋은 점 중의 하나는 사태 파악을 빠르게 하고, 나의 욕심을 알아차리며, 그들에게 서운함을 느낄 틈도 없이 감정 정리를 끝낼 수도 있다는 것.
암시랑도 안 허요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주고, 친구가 받았으며, 어떻게든 해 먹을 것'이므로 애초에 가진 나누기의 본질은 살아있는 것.  

반응까지 기대하는 건 내 욕심.ㅎㅎ


*사진: 50살 내 친구들이 외면한 막장의 라벨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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