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들어온 책을 정리하던 늦은 오후, 언제나처럼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작은 소녀가 있었다. 오늘도 소녀는 가볍게 목례만 하고 미술 관련 수입도서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두툼한 양장본의 화집을 들고 서너 장 넘기던 소녀의 어깨가 가볍게 떨리는 걸 보았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갔다.
AI 제작
"무슨 일 있어?"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붉었다.
"저... 이제 안 올 것 같아요."
"왜?"
"미대 안 가기로 했어요."
소녀의 목소리가 작았다.
"부모님이 반대하셔서요. 그림 그려서 뭐 먹고 사냐고, 그
냥 이과 가래요."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들었다.
"선생님들도 그러세요. 재수하면서까지 미대 갈 만큼 재능이 있냐고. 차라리 안정적인 길 가래요."
소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근데... 전 그림 그리는 게 좋은데."
나도 한때 그런 말을 들었다.
"광고 20년 했으면 됐잖아. 이제 와서 소설? 몇 살인데?"
"먹고살 수는 있어? 책 팔아서?"
"취미로 하면 되지, 왜 직업을 바꿔?"
사무실을 정리하던 날, 동료가 물었다.
"정말 할 거야?"
"응."
"미쳤네."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진심이 섞여 있었다.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는데, 빈 원고지 앞에서 손이 떨렸다.
20년 동안 광고 카피를 써왔다. 짧고 강하고 팔리는 문장들.
그런데 이제 소설을 쓴다고? 누가 읽을까?, 출판사가 받아줄까?,
먹고살 수는 있을까?
나는 펜을 놓고 서랍을 열었다.
오래전 샀던 책 한 권, 《갈매기의 꿈》이 거기 있었다.
책을 펼쳤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다른 갈매기들처럼 살지 않았다.
먹이를 위해 날지 않고, 그저 날고 싶어서 날았다.
완벽한 비행을 위해 매일 연습했다.
무리는 그를 추방했다.
"갈매기는 먹기 위해 난다. 너는 그 이유를 잊었다."
조나단은 홀로 남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매일 바다 위를 날며 한 번의 날갯짓, 한 번의 시도를 반복했다.
실패해도 다시 날아올랐다.
나는 책을 덮고 다시 펜을 들었다. 첫 문장을 썼다. 어색했다.
지우고 다시 썼다. 여전히 어색했다. 그래도 썼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누가 읽을지 몰랐다. 출판될지도 몰랐다. 그래도 썼다. 조나단처럼.
"그림 그리는 게 좋으면 그려야지."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근데... 부모님이..."
"부모님 말씀도 맞아. 먹고살기 힘든 건 사실이니까."
소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런데 말이야, 좋아하는 걸 하지 않으면 결국 더 힘들어. 안정적인 길 가도 힘들고, 돈 벌어도 힘들어. 어차피 힘든 거, 좋아하는 걸 하면서 힘든 게 낫지 않을까."
소녀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능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정하는 거야. 선생님이 정하는 게 아니고."
나는 책장으로 가서 얇은 책 한 권을 꺼냈다. 《갈매기의 꿈》.
"이거 읽어봐."
소녀가 책을 받아 들었다.
"갈매기 이야기예요?"
"응. 날고 싶어서 나는 갈매기. 다른 갈매기들이 추방했어. 쓸데없는 짓 한다고. 그런데 이 갈매기는 계속 날았어. 매일, 혼자서도."
소녀가 책장을 넘겼다.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야. 좋아서 한 거지."
나는 소녀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넌 이미 매일 여기 와서 화집 봤잖아. 그게 재능이야. 좋아하는 마음."
소녀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천천히 읽어봐. 그리고 결정해. 네가."
소녀는 책을 가슴에 안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문을 나서는 소녀의 작은 뒷모습을 창가에 서서 바라보았다.
손에 든 책을 꼭 쥐고 걸어가는 모습.
조나단도 저렇게 시작했을 것이다.
혼자, 작게, 한 번의 날갯짓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