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삶이 담긴 헌책방

by 김준호

조금 쌀쌀해진 이른 저녁, 책방으로 한 청년이 들어왔다.

빳빳하게 다려진 흰 셔츠에 깔끔한 슈트, 넥타이가 매어져 있었다.

구두 굽 소리조차 규칙적이었다.

청년은 책장 사이를 오가다 철학서들이 있는 책장 앞에 섰다.

불규칙하게 쌓인 책들 사이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났다. 청년이 잠시 주춤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꺼내고, 하이데거의 두꺼운 등 표지를 쓸었다. 손끝이 조심스러웠다.

너무나 꼿꼿한 그의 자세에서 틀에 박힌 그의 삶이 보이는 듯했다.


"찾으시는 게 있나요?"


"삶의 의미 같은 거요. 내가 지금 어디쯤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려줄 세상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줄 만한 철학 책이 있을까요?"


나는 책장 구석에서 낡은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리스인 조르바》


청년이 안경을 치켜 쓰며 표지를 봤다.


"그리스인 조르바... 이건 소설 아닌가요? 저는 철학 책을 찾고자....."

"이 책이 철학 책보다 나을 겁니다."


청년이 나를 봤다.


"바로 정답을 알려주는 책을 찾으시나 봐요?"


".네."


"어느 책도 답을 안 줘요. 대신 이 책은 당신이 이미 만들어놓은 정답지를 찢어버리게 만들 겁니다."


청년이 책을 펼쳤다.


"이 책의 주인공 조르바는 예순 살 그리스 노인입니다. 책은 한 권도 안 읽었어요. 하지만 매일 춤을 추고, 술을 마시고, 여자를 사랑하죠."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이 책의 화자는 당신 같은 사람입니다. 젊은 지식인이죠. 책만 읽고, 머리로만 생각하고, 모든 걸 계획하려는. 그런 사람이 조르바를 만나요. 크레타 섬에서."


청년이 책장을 넘겼다.


"조르바는 그에게 말합니다. '두목, 너무 생각하지 마. 그냥 살아.' 광산 사업이 망해도 웃고, 실패해도 춤추고. 화자는 그 모습을 보며 깨닫죠. 자기가 평생 '살지' 못했다는걸."

ai 생성 춤추는 조르바


"하지만 저는"


청년의 말이 잠시 끊겼다.


"체계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계획이 있어야 하고. 수많은 자기 계발서도 읽어봤고, 역사책도 읽어봤어요. 그런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데 아직 길을 못 찾으신 건가요?"


침묵이 흘렀다. 먼지가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만큼.

청년이 넥타이를 조금 풀었다. 답답했던 듯. 경직된 자세가 조금 느슨해졌다.

그리고 책을 집어 들었다.


"읽어보겠습니다."


며칠 후, 문이 열렸다.

같은 청년이었다. 하지만 뭔가 달랐다.

넥타이가 없었다. 셔츠 단추 두 개가 풀려 있었다.


"읽었습니다."


청년이 희미하게 웃었다.


"정답지는 찢으셨나요?"


"찢어지더군요. 아니, 조르바가 춤추며 밟아버렸습니다."


청년이 창밖을 봤다.


"책 마지막에 조르바와 화자가 해변에서 춤을 춰요. 광산은 망했는데 춤을 추죠. 저는... 그 장면에서 울었습니다."


"아직 춤추는 법은 모르지만, 일단 걷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 보려고요. 계획 없이, 그냥 리듬에 맡겨서요."


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청년이 문을 나섰다. 구두 굽 소리가 전보다 가벼웠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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