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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주 Dec 30. 2024

바꿔야 하는 것과 지켜야 하는 것

26년 동안, 아이를 낳을 때를 제외하고는 손에서 디자인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과녁의 중심에서 멀어진 어느 지점에 멈춰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한동안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라고 믿으면서 새로운 걸 배우고 시도하는 걸 외면해 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변화하는 시장 환경 속에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변화에 앞서 예측하며, 필요에 따라 방향을 유연하게 조정하는 능력. 이를 애자일(Agile) 또는 적응적 대응(Adaptive Management)이라 한단다. 나는 그 부분에서 부족했다.


회사를 운영하는 입장에 서고 나서야 이를 뼈저리게 실감한다. 직장인이던 시절에는 주어진 일을 해내는 데만 급급해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니 부족했던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바뀌어야 작은 회사라도 운영할 수 있었다.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하려는 노력은 나이와는 무관한 필수가 되었다.




과거를 되짚어보면, 자료조사 방식만 봐도 시대의 변화를 체감할 수 있다. 첫 회사에서는 신문 스크랩으로 자료를 조사했다. 매일 세 가지 신문을 읽고, 신문광고를 오려 스크랩한 뒤 체계적으로 분류하며 자료를 모았다. 디자인 잡지는 사수가 먼저 읽고 남은 부분을 활용했다. 자료 수집에도 순서가 있었다. 누가 더 좋은 자료를 먼저 발견하고 활용하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운 좋게 좋은 자료가 내 손에 들어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어떤 자료든 스크랩은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아파트 분양 광고를 의뢰받으면 현장에 나가 전단지와 브로슈어를 모아 공부하며 참고했다. 각 분야마다 체크해야 할 부분들이 다 달랐기 때문이다. 때로는 분양 고객인 척하며 자료를 받아오기도 했다. 이렇게 모든 일을 발로 뛰며 해결했다. 코엑스에서 전시회가 열리는 날이면 큰 종이가방은 필수였다. 한 바퀴만 돌아도 가방이 가득 찼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을 집으로 가져와 업종별로 분류하고 나만의 보물 창고에 보관했다. 필요할 때마다 꺼내 보며 활용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클릭 몇 번이면 모든 자료 조사가 가능한 시대다. 브로슈어나 디자인 자료를 보고 싶다면 핀터레스트 같은 사이트에서 다양한 디자인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폰트가 넘쳐나고, 유료뿐 아니라 무료로 제공되는 이미지 플랫폼도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이제 내가 소중히 모아놓았던 수많은 스크랩은 분리수거통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디자인에 사용하는 프로그램도 크게 달라졌다. 나는 포토샵 4.0 시대부터 디자인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익숙한 툴만을 고집하고 있다. 새로운 버전을 사용할 때면 어색함을 느끼며 기존 방식만 고수하게 되고, 배우는 것이 부담스러워 미루기도 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 따라가기 벅찰 때가 많다. 시대가 발전하면서 나도 함께 성장했어야 했지만, 그 변화는 종종 나를 앞질러갔다.


그렇다고 해서 멈춰야 할까? 나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이 시대와 발맞춰 나아갈 수 없다. 디자인, 서체, 컬러 등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아집과 고집을 내려놓고 흐름에 발맞추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 눈과 귀를 닫아서는 함께 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늘 연구하고 노력하며, 필요한 선택을 통해 변화해 나가고자 한다. 말로만 하는 변화가 아니라 행동으로 이어지는 변화가 필요하다.


잦은 야근 후에도 책을 읽고, 각종 교육 플랫폼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 노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씩 해내며 업무에 적용하고 그 성과를 확인하는 즐거움은 크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우고 성장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아야 할 것도 있다. 바로 인간관계다. 팀워크와 배려, 그리고 소통이다. 신입을 가르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의 디자이너가 성장할 수 있다. 가르치는 것을 귀찮아하거나 자신의 것을 나누지 않으려 한다면, 그 사회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나 또한 신입과 일하는 것을 꺼린 적이 있다. 학교에서 배운 신입에게 실무를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는 일은 분명 피곤하다. 단순히 사수일 때는 나도 귀찮아했었다. 신입이 들어오면 일거리가 늘어난다고 생각했다. 기존 디자이너들이 신입 채용을 꺼리는 이유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디자인 산업이 발전하려면 디자이너 양성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래야 디자인 퀄리티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신입은 사수를 존중하며 본받아야 한다. 아무리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다지만, 사수도 사람이다. 순응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후배가 더 예쁠 수밖에 없다.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다. 사수가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지만, 후배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동안 힘들게 배웠던 노하우를 말 한마디로 전수해 주는 것이다.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기본적인 소양이 광고주와의 소통 문제도 해결한다. 이런 태도에서 광고주나 거래처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올바를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이 생각했을 때 꼰대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소통이 되고 오해가 풀리며 문제가 해결된다.


요즘 AI가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이야기가 많다. 사람이 하던 일을 대신할 수 있는 기술이 계속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은 진상 고객을 상대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진상 고객을 어떻게 AI가 다루겠는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바로 소통이다. 상대방의 감정과 분위기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대처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고유한 역량이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인간관계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본질이다.


결국,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의 예절과 소통의 가치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때 비로소 함께 성장할 수 있다. 단순히 잘 지내는 것을 넘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가 될 때 퍽퍽한 사회생활도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맺는 관계에 따라 업무의 성과와 효율성은 크게 달라진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26년 동안 디자인 업무를 하며 깨달은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어떤 일이든 변화가 필요한 부분과 반드시 지켜야 할 부분이 공존한다. 앞으로 내가 회사를 얼마나 오래 운영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업무에 필요한 변화는 망설이지 않고 받아들이고 과감히 실천할 생각이다.


하지만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는 바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일이 성사되려면 동료가 필요하고, 같은 일이라도 누구와 함께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인간관계를 내 일의 중심에 두려고 노력한다.  사람과의 신뢰와 소통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나 계획도 빛을 잃는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워왔기 때문이다.


살아가면서 확신하게 된 건, 사람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는 것이다. 이건 내가 디자인 일을 하며 쌓아온 철학이고, 앞으로도 변치 않을 내 삶의 기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지금의 나의 모습은 열심히 노력해 온

과거의 내가 있었기 때문이란 걸 잊지 말자.

그 부분은 인정하고 앞으로 더  나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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