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의 끝자락에 접어들며 야근이 잦아졌다. 늦은 밤 귀가하면서 벌써 올해가 막바지구나라는 생각과 열심히도 살았네 등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올 한 해 동안 직원들과 영화 한 편조차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스케줄을 확인하니 다음 날 아침이 비교적 여유로웠다. 그렇게 모아나 2를 예매하며 작은 일탈을 계획했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덤으로 했다.
다음 날 아침, 출근 후 예정된 업무를 빠르게 마치고 극장으로 향했다. 넓은 영화관에는 우리 셋과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 총 다섯 명만이 자리를 채웠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한가해서 좋았다. 극장에 온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다행히 모두 모아나 전편을 본 덕에 줄거리 연결에 어려움은 없었다. 영화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모험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향해 나아가는 두려움과 그 끝에서 발견하는 가치가 담겨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 깊이 와닿는 명언들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대사를 밈으로 활용할 것 같다. 조만간 각종 SNS 채널에서 보이겠다.
나도 영화를 보며 큰 위로와 공감을 느꼈다. 애니메이션 러닝타임이 100분이었는데, 그 시간 동안 몰입하며 나의 상황을 대입하게 되었다. "나도 모아나처럼 미지의 항해를 하고 있구나." 내 앞에 펼쳐진 커다란 비즈니스라는 바다를 항해하고 있구나.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지만, 그 모든 것을 헤치고 길을 찾아가고 있는 중인 거다. 그래서 힘든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항해를 마쳤을 때,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모아나처럼.
영화가 끝난 뒤, 신 팀장이 말했다. "꼭 우리 얘기 같아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 영화 한 편으로도 이런 힘을 받을 수 있다. 콘텐츠의 힘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렇다면 이런 콘텐츠를 제작하는 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그것을 이뤄냈을 때의 감정은 어떨까? 단순히 일거리가 없어질까 두려워 시작했던 콘텐츠 제작이 이제는 끝까지 해내야 할 숙제가 되었다. 말로는 "느리지만 한 걸음씩 거북이처럼 나아가고는 있어요"라고 하는데. 사실 너무 느려서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을 묵묵히 걷는다는 것은 마치 안갯속을 걷는 기분이다. 앞이 조금 보일 것 같다가도 다시 희미해지곤 한다. 그러나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기에 버틴다. 오기이기도 하다.
연말이다 보니 회사도 정신없이 바쁘고 어수선하다. 광고주 측의 인사이동으로 일정이 변동되었다. 담당자 변경으로 일 자체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반대로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디자인 업계는 종종 "이 디자인 어디서 했나요?"라는 질문과 함께 일이 연결되곤 한다. 그렇기에 작은 프로젝트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테트리스처럼 빠질 것은 빠지고, 채울 것은 채우며 내년도 사업을 안정적으로 준비하고 있다. 다행히 내년에도 디자인 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 같다.
이번 영화 관람 후 느낀 점은 하나다. 우리의 콘텐츠 사업을 빨리 정착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내년에는 이를 본업으로 삼아 더욱 집중해 보자고 직원들과 이야기했다. 회의에서 이 프로젝트를 끌고 갈 것인지, 멈출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우리가 시도하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멈추기에는 후회가 클 것 같았다. 그래서 중단했던 툰 제작도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정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된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접어야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100호 뉴스레터 발행이라는 목표는 달성했다. 그렇게만 하면 무엇인가가 된다는 누군가의 말 때문에 악착같이 지켜왔지만, 누구나 말하는 성공에는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제야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무엇이든 올인을 해야 성공 근처라도 갈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깨닫는다. 잠도 줄이고, 더 노력해 보자. 내가 좋아하는 무협지도 잠시 내려놓고, 아니 조금만 줄이고 다시 힘을 내보자.
한 가지 더. 내 오른팔 같은 신 팀장이 아프다. 늘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해주는 든든한 동료. 한 달 정도 쉬고 복귀했지만, 여전히 아프다. 결단을 내리기 위해 "일이 하고 싶으냐"라고물었다.정말 하고 싶단다. 그만둘 생각을 해본 적없다고. 오히려 더 절실해졌다고 한다. 하지만 회사에 해가 되지 않을까 망설여진다고 한다. 사람이 중요하지, 일이 중요한가. 나에게는 정말 중요한 사람이지만, 아픈 사람에게 강제로 일을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하고 싶다면 해야지. 그래서 일의 부담을 줄여주는 한이 있더라도 함께 가기로 했다. 나이 들어 편한 길을 선택하기보다 새로운 길을 함께 갈 수 있었던 건 이 친구 덕분이다. 누군가의 지지와 믿음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런 지지와 믿음을 또 어디서 받을 수 있을까. 그래서 끝까지 함께 하고 싶다.
모아나에서도 모두가 각자의 두려움 속에서 하나로 뭉쳤고, 결국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지금 우리의 항해가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지만, 함께하는 이 여정이 의미 있다고 믿는다. 설사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우리 길의 거름이 될 것이다. 세상에 쓸모없는 일은 없으니, 후회하지 않기 위해 다시 한번 힘을 내본다. 긴 항로를 수정하고 변경하며, 하나하나 길을 찾아가 보자. 함께 하니 할 수 있다.
사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다. 그냥 본업인 디자인만 하면 될 것을. 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나. 하지만 누가 미래를 확신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뉴스레터 구독자 수를 바라보며 눈싸움을 해본다. 누가 이기나 해보자. 그 성공이 어떤 맛인지 꼭 알아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