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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평생 피보팅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by 문현주

일은 늘 예상 밖으로 흘러간다. 그래도 멈출 순 없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막히면 다른 길을 찾는다. 그렇게 살아온 게 벌써 오십 년이 넘었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결국 '일평생 피보팅'이었다.


유난히 길었던 이번 추석 연휴. 누군가에겐 쉼이었겠지만, 나에겐 또 다른 일터였다. 팀장, 과장, 주임, 그리고 약발 떨어진 이사님까지. 한 명 한 명 떡값 건네며 잘 보내라 인사했지만 연휴 내내 머릿속은 회사 생각이었다. 예전엔 떡값 받고 어떻게 쓸까만 생각했는데, 이젠 마냥 편하게 쉴 수가 없다. 회사를 운영한다는 건 이런 무게를 견디는 일이라는 걸 이제야 좀 안다.


열흘 넘는 연휴 동안 딸아이 예고 준비로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아침마다 데려다주고, 저녁마다 데리러 가는 라이딩이 일상이었다. 연휴 내내 나를 위한 시간은 없었다. 운전대 잡고 돌아오는 길에도 머릿속은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3차 미팅까지 갔던 콘텐츠 프로젝트가 무산됐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공들인 일이 물거품 됐을 때 처음엔 무덤덤했는데 생각할수록 가라앉았다. 길을 잃었다고나 할까. 이걸 계속해야 하나. 끝까지 가야 한다는 걸 알지만, 솔직히 지쳤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게다가 한 명을 퇴사시켜야 하는 현실적인 고민까지 겹쳤다. 이번 추석은 명절이 아니라 결정을 미루는 시간 같았다.


연휴 전, 신팀장과 장항동, 파주 거래처를 돌았다. 인쇄소, 코팅, 제본, 행낭 업체 찾아가 선물 전하며 인사했다. 거래처 부장님들은 오히려 미안해했다.


"우리가 더 잘 챙겨드려야 하는데, 이렇게 직접 오시다니요."


누가 주면 어떠리. 서로 믿고 오래 일하다 보니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디자인했다고 끝이 아니다. 인쇄하고 납품하는 순간까지가 진짜 '일의 완성'이다. 아무리 멋지게 디자인해도 인쇄나 코팅, 납품에서 문제 생기면 모든 게 무너진다. 그래서 현장 사람들에게 늘 감사하다. 매번 급하게 맡겨도 끝까지 챙겨주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니까. 솔직히 그날 나는 마음이 꽤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현장 돌며 사람들 만나니 묘하게 에너지가 돌아왔다. 내년 추석에도 또 이렇게 다닐 수 있으면 좋겠다.


거래처 돌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선물이 있었다. 회사 막내가 손 편지와 함께 준 커피 쿠폰. 받은 선물 중 가장 기뻤고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바로 그 손 편지 한 장 때문이었다.



사람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가 사람 덕분에 풀릴 줄이야. 장항동과 파주에서 만난 부장님들, 사장님들의 따뜻한 환대. 그리고 함께 일하는 사람의 진심 어린 손 편지 한 장.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결국 사람에게서 치유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 거지. 앞으로도 어려운 결정들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이 따뜻한 순간들을 기억하며 다시 한 걸음 내디뎌보려 한다


고민 끝에 결국 입 하나를 줄이기로 했다. 2년째 함께한 디자이너와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앞으로 모자란 손 때문에 주말에 나와 일해야 하는 날이 많아질 거다. 전에 힘들었을 때 그렇게 해서 회사 돌아가게 했는데 지금이 그런 시기다. 결정하고 이야기하고 나니 미안하긴 했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홀가분했다.


사람 들어왔다 나가는 건 늘 마음이 체한 것 같다.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 무뎌질 법도 한데, 이젠 좀 그래도 될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아프다. 일이라는 건 결국 '타이밍'이다. 모든 게 맞아떨어져야 하고, 서로 다른 걸 바라보는 사람끼리 같은 곳을 함께 본다는 게 참 어렵다.


다시 피보팅을 떠올린다.

"이게 안 되면, 요거라도 꼭 되게 하라."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자세. 그리고 유연하게 생각하는 것. 한화손보 때도, 농협 미팅 때도 그랬다. 위기를 겪을 때마다 나는 피보팅으로 길을 찾아왔다. 처음 생각한 방향대로 흐르지 않을 때가 많았지만, 그럴수록 포기하지 않고 상황에 맞는 대안을 내놓으며 기회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이번엔 진짜 될 거야." 그 믿음이 컸던 만큼 무너졌을 때의 허탈감도 깊었다. 아무리 대안을 내놔도 통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걸 이번에 배웠다. 이런 거는 배우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그게 내 방식이다. 넘어져도, 돌아서도, 결국 다시 걷는 것. 일평생 피보팅.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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