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전공하면서 인쇄 광고, 잡지 광고,편집 디자인 등 다양한 교육과정을 배웠다. 졸업 후 진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기획과 제작. 나는 두 가지 모두 흥미로웠고 재밌었다. 기획하고 내 손으로 직접 제작까지 하는 게 적성에 맞았다.
졸업할 즈음에는 취업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충무로 광고 기획사들이 문을 닫고 선배들은 퇴사하기 일쑤였다. IMF가 그 이유였다. 그 와중에 다행히도 과사무실에서 면접을 보겠냐는 연락이 왔다.
지금도 잊지 못한다. 선릉역 1번 출구. 샹제리제빌딩 안에 MTM이라는 종합광고대행사. 가자마자 심층면접을 본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쿽 프로그램을 잘 사용하는지 테스트한단다. 그래서 난데없이 포항제철 5단 신문광고 편집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IMF 때 폐업하기 일보직전까지 갔다가 직원들은 다 퇴사하고, 포항제철 광고가 들어와서 면접이라는 이름으로 일을 시켰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그때 당시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면접비용 5만원을 받았다.
김포와 선릉역. 98년 12월 겨울부터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출근하느라 고생 많이 했다. 평생 할 상모 돌리기를 이때 하지 않았나 싶다. 자면서 머리는 까치집 짓기 일쑤였다.
학교에서 다 배웠다고 생각했다. 떨리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 했다. 학교에서 배웠던 것은 이론이었다.
아직도 첫 회의 때가 생각난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광고주와의 소통, 거래처와의 소통, 회의할 때 등 현장에서 쓰이는 용어들이 생소했다.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20년이 넘는 경력이 쌓여도 마찬가지다. 2022년도에는 업무 끝나고 저녁에 HTML을 배우러 학원에 다니기도 했다. 나는 영타를 정말 못 치는 학생이었다. 부끄럽게도 선생님이 영타연습부터 하자고 했었다. 교육생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지만 끝까지 수료한 모법생이기도 했다.
이만큼 경력이 쌓여도 내가 모르면 외주를 주거나 직원들에게 일을 시킬 수 없다. 그래서 늘 배우고 있다. 디자이너라고 불리는 순간부터 진정한 공부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각종 AI와 씨름 중이다. 특히 ChatGPT랑 대화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왜 자고 일어나면 알아야 할 게 한가득인지. 하필이면 디자이너가 되어서, 은퇴해야 하는 나이에 아직도 배우면서 일하고 있다.
작업 하나하나 할 때마다 팀원이랑 다 공유하고,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서 수정할 거 얘기하고, 서로 의견 주고받으면서 계속 다듬어. 그렇게 해서 더 좋은 방향으로 가고, 클라이언트한테 가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검증을 한다.
그러다 보면 통과되는 시안 하나쯤은 꼭 나온다. 그렇게 해서 내보낼 자신도 있고, 해낼 자신도 있다. 그런 스트레스를 매일같이 겪으면서도 버티고, 또 이겨내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벌써 6년. 원래는 퇴사하고 혼자 조그맣게 1인 사업이나 해볼까 생각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회사를 맡게 됐다. 우리 회사는 딱 5명. 디자이너 세 명, 나, 그리고 영업이사님.
나는 지금 회사 운영 전반을 다 맡고 있다. 기획, 카피라이팅, 경리업무는 물론이고, 손이 부족하면 디자인 실무도 하고, 웹툰도 그리고, 뉴스레터도 직접 만든다. 가끔은 내가 회사 전체를 몸으로 들고 있는 느낌이다.
아슬아슬한 외줄타기 같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여기까지 잘 버텨냈다. 직원들 급여 한 번 안 밀렸고, 거래처 결제도 매달 수천만 원씩 차질 없이 잘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좀 더 가볍게, 라이트하게 살고 싶다. 정시에 출근해서 칼같이 퇴근하는 직원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는 왜 이렇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싶다.
굳이,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가끔은 예전에 같이 일하던 디자이너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진짜, 밤새워가며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보자고 욕심내던 시절이었다.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미도 있었고, 뭔가를 '함께 만들어가는 느낌'이 있었다.
결국,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게 회사 일이니까. 언젠가는, 정말 언젠가는 이런 고민들에도 결단을 내릴 날이 오겠지.
오늘은 뭘 배워야 할까. 사이버 대학, 클래스101, 탈잉, 패스트캠퍼스, 퍼블리를 기웃거리며 하루를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