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주 미팅은 오랜만의 나들이!
어느 날, 안정적이던 일상에 오랜만에 DB생명과의 미팅 일정이 잡혔다. 요즘은 DB손해보험과만 거래를 이어오던 터라, DB생명 소식지 작업 미팅 요청은 뜻밖이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큰 기대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강남 나들이에 나섰다. 강남에 위치한 DB금융센터에는 생명보험과 손해보험 등 여러 DB 계열사가 한 빌딩에 모여 있다. 그래서 미팅이 있는 날이면 이 층 저 층을 오르내리며 각 부서를 들러 담당자들을 만날 기회를 얻곤 한다.
사무실에서 컴퓨터와 씨름하던 디자이너가 이렇게 직접 광고주를 만나러 나서는 일은 사실 쉽지 않다. 그렇기에 이런 기회가 생기면 시간을 잘 활용해야한다. 요즘은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일하는 게 흔하다. 그래서 이렇게 직접 만나 인사를 나누고 관계를 단단히 다지는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날도 셋이 함께 가서, 두 사람은 DB생명으로, 한 사람은 DB손해보험으로 각자 자리를 잡고 들어갔다.
보험사들은 보통 월말마다 설계사 교육자료 제작이 한창이다. 영업교육이나 상품교육에 필요한 자료들이라 시기가 비슷하고, 경쟁도 치열하다. 디자인 퀄리티나 단가가 맞지 않으면 언제든 업체를 바꾸는 게 이 업계의 현실이다. 이번에는 마침 연락이 닿았고, 소식지 디자인과 인쇄를 전문으로 하는 우리 회사가 후보에 올랐다. 솔직히 인쇄 단가는 우리가 좀 높은 편이다. 종이값 할인율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인쇄소는 대량으로 종이를 사들여 할인율이 높은 반면, 우리는 디자인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단가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쇄소에서는 디자인을 서비스로 제공하는 경우도 많아 단가 차이는 더 벌어진다. 그렇다고 우리가 단가를 맞추려고 무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디자인 퀄리티로 경쟁하고 있으니까.
나와 막내 디자이너는 DB생명에 들어 갔다. 미팅 중에 상대방이 물었다.
“디자이너가 몇 명인가요?”
“저까지 세 명입니다.”
상대방이 조금 놀란 듯 다시 물었다.
“대표님도 디자인을 하세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네, 저는 실무형 대표입니다.”
말은 쉬웠지만, 사실 대표가 직접 디자인을 하는 걸 보면 광고주는 ‘이 회사가 작으니 단가도 낮아도 되겠군’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디자인 퀄리티에 자신이 있다. 단가를 낮추지 않겠다는 고집스러운 방침이지만, 덕분에 다른 광고주들이 우리를 찾는다. 시장 단가가 많이 떨어진 현실은 안타깝지만, 우리는 다르다. 전문가로서 광고주가 우리를 찾아오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 물론 현실은 녹록지 않지만 말이다.
혹시 깍두기를 아시나요?
내 역할이 경영에만 그칠 수는 없다. 실무형 대표로서 나는 직접 움직인다. 프리랜서와 협업해 일정을 맞추기도 하고, 글을 쓰다가 디자인을 하다가, 때로는 사무실의 쓰레기 봉투가 떨어지면 직접 사러 나가기도 한다. 마치 어린 시절 놀이에서 “깍두기” 같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 편을 나눠 놀이를 할 때 인원이 홀수면 양 팀을 오가며 모두를 도와주는 깍두기 역할을 한 사람이 꼭 있었다. 나는 그런 깍두기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특정 팀에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상황에 맞춰 일을 해나가는, 다재다능한 깍두기 역할이다.
“깍두기”는 원래 무로 만든 김치의 한 종류로, 깍둑썰기로 만들어진다. 이 깍두기는 어디에나 잘 어울리며 주 음식에 구애받지 않는 반찬이다. 그래서 놀이에서도 “어디에도 잘 어울리며 특정한 자리에 종속되지 않는 존재”라는 의미로 깍두기라는 말이 쓰였다.
나에게 딱 맞는 말 아닌가. 그래, 나는 깍두기다.
매 순간 어디서나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깍두기 같은 존재다.
글을 쓰다가도 디자인을 해야 하고, 거래처에 입금을 하기도 하고, 세금계산서를 발행하기도 한다. 마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하듯, 이 일 저 일 오가며 반복하는 것이 일상이다.
혹시 디자인 회사 창업을 꿈꾸시는가?
그렇다면 진정한 깍두기가 될 준비가 되었는지 점검해보자.
디자인 전공자라도 경리 업무도, 세무 일도, 경비 처리도, 회사 살림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무늬만 깍두기가 아니라, 상황에 맞춰 정확히 움직일 수 있는 잘 익은 깍두기 말이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다 하다 보니, 정작 꼭 해야 할 일은 모두 퇴근한 저녁 시간이나 주말에야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루 24시간이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일의 연속이다. 점점 더 ‘맛있는 깍두기’가 되어가는 과정이려나..
그래서 결론은 하나다.
“훌륭한 깍두기가 되어야겠다.”
간도 맞추고, 여기도 저기도 잘 어울리는 깍두기 같은 존재로.
월요일 아침 7시에 출근해 사무실 바닥을 진공청소기로 밀고, 청소포 밀대로 구석구석 닦고, 노화를 방지해준다는 히비스커스 차를 타서 책상에 앉았다. 오늘의 업무 준비가 끝났다. 직원들이 출근했을 때 바로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정돈된 환경을 만드는 것 또한 훌륭한 깍두기의 역할이겠지.
오늘도 나는 훌륭한 깍두기가 되기 위해 애썼다.
잘했다.
moon hyun 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