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탁!”
책상 건너편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클라이언트와 통화하던 직원이 전화기를 부서지듯 내려놓은 소리였다. 네 명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12평 사무실. 대각선에 앉아 있던 나도 깜짝 놀라 쳐다보았다. 이 작은 공간에서는 모든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음악을 틀어놓지 않으면 키보드 소리, 마우스 클릭 소리까지 다 들린다. 통화 내용이 들리는 건 당연했다. 택배로 보낸 물건이 젖어서 도착한 것 같았다. 죄송하다는 말로 마무리한 통화였지만, 뭔가 불쾌했던 모양이다.
화내지 않은 게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무리 동료처럼 지내는 대표라도, 전화기를 저렇게 내려놓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 할까 하다 참았다. 괜히 보탰다가는 더 기분 나빠질 테니, 속으로만 “왜 저럴까?” 하며 지나쳤다.
이 직원은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마음에 안 들면 얼굴에 드러났다.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스타일이라 나는 늘 불편했다. 내가 잘못한 일이더라도 그 표현 방식이 날 종종 무안하게 만들었다. 언젠가는 물티슈 뚜껑을 닫지 않았다고 “대표님, 뚜껑 좀 닫아주세요. 다 마르잖아요.” 하는데, 나도 모르게 당황해 “네”라고 했지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세대가 솔직하다더니 이런 걸까, 하고 넘겼지만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옛날 사람인가?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면서 갈등은 쌓여 갔다.
결국, 내가 너무 편하게 대해왔나 싶어 말을 줄이려 마음먹었다. 하지만 작심 세시간이었다. 아줌마 본능대로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말을 해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말이다.
팀장은 재택근무 중이라 사무실엔 나와 이 친구 둘만 있는 시간이 많았다. 가끔 밤에 이불을 차며 ‘내가 이걸 왜 참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김포에서 어렵게 구한 인재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투닥투닥 거리며 일한 지 3년이 되었을 무렵, 새 직원을 채용하게 되었다. 잘 지낼수 있을까 걱정이었는데 역시나였다. 몇일 같이 일하더니 불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얼마 안 되어 결국 그만두겠다고 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자고 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신입으로 들어와 조금씩 자리를 잡던 때라 아쉽긴 했지만, 마음이 오히려 홀가분했다.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성장해 가기를 바랄 뿐이다.
예전에는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더 복잡해졌다. 특히 사무실의 공기가 가벼워졌다가 무거워졌다가 하는 것에 예민해졌다. 사람을 가르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게 상사의 역할이라지만, 그 과정에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늘 경험으로 해결해온 나였지만, 점점 그 균형을 이루는 일이 버거워졌다.
이와 반대로, 맡은 일을 묵묵히 잘해내지만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직원도 있었다. 김포로 사무실을 옮긴 후 처음 함께한 남자 직원이었다. 카드 뉴스를 센스 있게 만들고 디자인 감각도 뛰어났다. 하지만 클라이언트와의 통화에서는 주눅이 들었다. 거래처와의 일 처리에도 늘 어려움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도 전화를 하거나 받거나 하는 업무를 계속 하게 했다. 자신감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내부 소통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디자인 작업에 대해 의견을 나누거나 방향을 물어보면 구체적으로 답하기 어려워했기 때문이다. 대화를 이어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무언가를 확인하거나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소통의 벽이 느껴졌다. 나 혼자 알아서 결정하고 진행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결국, 디자인 작업에만 집중하도록 역할을 조정했다. 그러면서 천천히 적응해 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과 함께 코로나19로 퇴사하게 되었다. 때때로 그 친구가 소통에 관한 더 많은 배움을 경험했다면 어땠을까 싶다. 맡은 일에 대한 성실함은 충분했다. 조금 더 자기 의견을 표현하고 협업의 즐거움을 느껴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사람과의 관계는 매번 다르다. 감정에 솔직한 사람도 있고, 소통이 서툰 사람도 있다. 그들에게 맞춰 대처하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만약 누군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사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람은 단순히 성과만 내면 되는 대상이 아니었다. 한때는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피드백하는 일이 쉽게 느껴졌지만, 이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상대방의 감정과 태도에 따라 나의 반응을 조절해야 한다는 점이 참 미묘하다. 오랜 세월 다양한 사람들과 일해왔지만, 여전히 사람은 어렵다. 대표의 위치에 서니 더 어려워졌다.
밤을 새워 눈이 벌게지도록 컴퓨터와 씨름하며 디자인하는 일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다. 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세대가 변하고, 세대마다 기대하는 방식이 달라지면서 나 또한 새로이 배워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있다. 김포에서 처음 만나 내 손으로 키운 3년 차 디자이너에게 조금 더 의지하며 함께 걸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도 든다. 소통에 어려움이 있어 일에 제약이 생긴 직원에게도 더 많은 기회를 주지 못한 게 내내 마음에 남는다.
세대가 변할수록 배워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소통 방식도 새롭게 익혀야 한다.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여도 사람과의 관계는 끝없이 배워야 하는 과제인 듯하다. 힘들더라도 조금 더 같이 걸어갔다면 서로에게 더 좋은 경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서툴고 후회되는 순간들도 있지만, 나는 이 모든 경험들이 결국 나를 더 나은 상사로 성장시켜 줄 것이라 믿는다. 앞으로 함께할 사람들에게 더 섬세하고 배려심 깊은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