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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국국어교사모임 Jan 26. 2021

[서평] 책 물음표를 던지고 느낌표를 남기다

이진미 인천석남중 2bloomingtree@gmail.com

다음 문장을 두 글자로 요약하면? 

국어 선생님이라면 대부분 독서를 즐기며, 가방엔 언제나 읽다 만 책이 들어 있을 것이다.

(효과음) 두구두구두구……. 

정답은 ‘오해’이다. 또는 ‘편견’이라고 해도 좋겠다.

어떤 국어교사의 취미는 독서가 아니라 철인 3종 경기일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지금부터 연습해서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느니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쪽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는 평범한 국어교사다. 그런데 ‘평범’이란 글자에 왜 힘을 잔뜩 주었을까? 제목처럼 이 글도 작은 물음표를 던지며 시작해 보겠다. 


첫 번째 질문. 1등에게 박수 치는 게 왜 놀랄 일일까? 

책을 읽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내게 책을 읽는 단 하나의 이유를 꼽으라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외칠 것이다. 재미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책장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흥미진진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책을 통해 느끼는 재미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쁨에 가깝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책은 가르쳐 준다. 최규석 작가는 《송곳》(창비)에서 이렇게 말했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이 달라지는 거야.” 좋은 책은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이끈다. 아슬아슬한 낭떠러지 끝으로, 때론 폭풍우 속으로. 그곳에서 보는 풍경은 안온한 집안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문학이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의 방법으로 우리를 자연스럽게 낯선 풍경으로 이끈다면, 더 명확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내가 갇혀 있던 알을 단숨에 깨 버리는 책들도 있다. 그들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는 ‘질문’이다.

“정말 그래?”

“과연 그럴까?”

이런 질문은 내가 그동안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던 세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킨다. 예를 들어,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 이 질문은 그대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1등에게 박수 치는 게 왜 놀랄 일일까?”

1등은 남들이 놀 때도 열심히 공부했을 테니 그 결과에 박수를 받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이렇게 고개를 갸웃거릴 때, 이 책은 연달아 질문을 던진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적이 좋은 학생을 칭찬하는 일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이를 조심스러워하는 나라들도 있어. 왜 그럴까? 1등은 못 했지만, 열심히 공부했거나 신나게 배움을 즐긴 친구들은 박수받을 자격이 없는 걸까? 우리 사회가 1등에게만 계속 박수를 보낸다면 사람들은 결국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이어지는 질문을 따라가면서 하나씩 답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낯선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질문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동안과는 다른, 새로운 각도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오찬호의 《1등에게 박수 치는 게 왜 놀랄 일일까》(나무를 심는 사람들, 2017)의 또 다른 장점은 수업에 활용하기 좋다는 점이다. 한 편의 글이 쉬우면서도 짧아 책을 싫어하는 학생들도 무리 없이 수업 시간 내에 읽어 낼 수 있다. 나는 중학교 원격수업에서 이 책을 활용했는데 대강의 방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수업 목표나 교사의 의도를 고려해 하나의 질문, 즉 한 편의 글을 선택한다. 1차시에는 글을 읽고 학습지를 통해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고, 2차시에는 토론 형식으로 서로의 생각을 나눈다. 이때, 몇 편의 글을 제시하고 그중에서 학생들이 관심 있는 질문을 스스로 선택하게 할 수도 있다. 2차시에는 같은 질문을 택한 학생들끼리 모이거나 한 질문에 대해 임의로 모둠을 구성하고 온라인 소모임 방에 모여 생각을 나눈다. 마지막으로 토론 소감을 간단히 정리하도록 하면 더 좋다. 


두 번째 질문선량한 차별주의자라고그게 말이 돼? 

좋은 질문을 던지는 책 몇 권을 더 소개한다. 먼저 소개할 책은 제목부터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 2019)이다. 이 책은 “차별은 나쁜 거 아니야?” 혹은 “차별하는 사람이 어떻게 선량하다는 거지?”라는 궁금증을 품고 책장을 펼치게 한다. 그리고 “나는 차별 따위 하지 않는 선량한 시민이야”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차별에 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한때 대학 신입생들 사이에서 ‘지균충’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지균충이란 지역균형선발전형으로 합격한 학생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같은 수능 점수를 받고도 농어촌 지역에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학에 불합격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억울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지역균형선발전형은 차별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단 의심하라!” 달리 표현하면 질문하라는 것이다.

수능 점수만으로 합격을 결정하는 게 정말 공정한 걸까? 특정 지역이나 학교 출신에게만 유리한 점은 없을까? 부모의 재산이나 직업, 교육 정도, 본인의 성별, 건강 같은 능력 혹은 노력이란 말로 퉁치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요소가 결과에 개입한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고려해서 공정성을 평가한다는 것이 가능하긴 한 걸까? 생각하다가 지쳐서 ‘에라, 모르겠다’ 하며 도망쳐 버리고 싶더라도 의심과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는 분명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말처럼 의심하지 않는 자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와 똑같기 때문이다. 스스로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믿을 때 사람들은 서슴없이 차별적인 언행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끊임없이 의심하며 질문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덜 차별적인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너는 어떤 옷을 입고 싶어? 

‘작은 옷에 숨은 큰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민정의 《옷장에서 나온 인문학》(들녘, 2014)은 다양한 사례를 들어 매일 입는 옷이 개인의 삶, 나아가 세상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저자는 싸게 사고 빠르게 버리는 패스트패션을 통해 환경오염과 저개발 국가의 아동노동 착취 문제를 제기한다. 또 이슬람 여성들이 입는 부르카를 통해 인권 침해와 종교의 자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가 하면, 명품 브랜드를 추종하는 현상을 통해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소비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이 책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은 “너는 어떤 옷을 입고 싶어?”이다. 저자는 그 질문이 곧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라는 질문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면 과연 그렇다는 생각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비슷한 맥락을 담고 있으면서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박지혜의 《누가 내 머릿속에 브랜드를 넣었지?》(뜨인돌, 2013)이다. 가격은 누구나 알다시피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결정된다. 하지만 둘 중 결정적 힘을 가진 것은 물건을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의 욕구, 즉 수요다. 따라서 기업은 끊임없이 소비자가 구매를 원하게끔 다양한 방식으로 구애를 한다.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든지 엄청난 광고비를 들여 유명한 연예인을 출연시킨다든지 혹은 마트나 편의점에서 1+1 상품으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식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며 기업의 유혹에서 나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네가 그 물건을 가지고 싶은 마음은 욕구일까? 아니면 욕심일까?”

“고가의 브랜드 상품을 구매하는 대신 찾을 수 있는 인생의 행복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면 소비를 강요하는 사회에서 현명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마케팅 지식이 훌륭한 방패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성에 대한 편견을 심어 줄 수 있는 문장이 곳곳에 보이니 학생들에게 권하기 전에 그 부분은 꼭 짚어 주는 게 좋겠다. 예를 들어 “안 한 척의 대가들은 주로 여학생 사이에 많다. 여자들은 질투와 경쟁심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같은 표현은 몹시 불편하다. 지금 같으면 편집 과정에서 걸러졌을 표현이다. 이 책이 2013년에 발간된 책인데 거꾸로 생각하면 수년 동안 우리 사회의 성인지 감수성이 향상된 증거라고 볼 수도 있겠다. 


네 번째 질문다름을 왜 받아들여야 할까? 

류승연의 《다르지만 다르지 않습니다》(샘터사, 2018)는 발달장애 아이를 둔 엄마가 쓴 책으로 ‘장애인과 어우러져 살아야 하는 이유’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장애 혹은 장애인을 넘어 다문화, 빈곤, 계층 등 다양한 범주로 확대해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다름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면 이사를 고민하는 이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다. 꼭 입시 경쟁에 뛰어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가 어울릴 친구나 학교 분위기가 좋은, 이른바 ‘좋은 학군’을 찾아 이사한다.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면 이런 생각이 아닐까? 학교에 다문화나 빈곤 계층 아이들이 많으면 학력 저하는 둘째치고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거칠고 폭력적인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내 자녀를 그런 아이들과 어울리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경제 수준이나 부모 학력, 직업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리고 싶다는 것인데, 이러한 욕망은 매우 보편적이라 딱히 속물적이라는 느낌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정말 다문화 아이들은 학력이 낮고 빈곤 계층 아이들은 폭력적일까? 여러 학교에 근무하면서 특정한 환경 요인에서 비롯된 경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 경향성에서 벗어나는 숱한 예외를 만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을 존재가 아닌 배경으로 앞서 판단한다면 편견이 개입해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다.

거꾸로 생각해 보자. 누군가 편견을 가지고 자신을 판단한다면 그것을 곱게 받아들일 사람이 있을까? 여자라는 이유로,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결혼했다는 이유로 혹은 결혼을 안 했다는 이유로 그 밖의 백만 스물두 가지 이상의 이유로 우리는 모두 편견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그리고 유전자의 다양성으로 인해 인류는 지금껏 멸종하지 않고 생존하며 발전해 올 수 있었다. 편견의 장벽을 넘어 다름을 다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은 우리 모두를 위해 꼭 필요하다. 


길을 잃고 헤매던 교사의 마지막 질문교육이 나아갈 곳은 어디인가? 

김희경의 《이상한 정상 가족》(동아시아, 2017)은 읽기를 즐기지 않는 학생이라면 다소 어렵다고 느낄 수 있지만, 선생님들께는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자녀 체벌, 미혼모 차별, 입양, 일가족 동반 자살 같은 가족의 문제를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책이 주는 메시지는 비단 가족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가족주의가 곳곳에 스며 있는 우리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 육아나 노인 부양을 책임지는 주체는 국가나 사회가 아닌 가족인 경우가 많다. 저자는 이처럼 가족 책임주의가 강한 사회일수록 비혼이나 저출산의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므로 가족에게 부과된 의미와 책임을 국가와 공공이 나누어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아동 학대가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나라에는 부모의 간섭을 지겨워하면서도 독립하지 못하는 자녀와 자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부모가 이렇게 많을까? 출산율이 떨어지다 못해 ‘국가 소멸’을 우려하는 상황에서 앞으로 우리 사회와 국가의 정책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나는 그중 마지막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보았다.

“변화하는 시대에서 학교와 교사는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학생들을 교육해야 할까?”

이전의 학교교육은 학생들이 오직 대학 입시를 바라보고 달리도록 채찍질해 온 경향이 있다. 줄 세우기식 평가를 하며 때로는 체벌과 벌점을, 때로는 학교생활기록부를 무기 삼아 더 좋은 입시 결과를 위해 질문 없이 노력하는 인간을 길러 왔다. 나는 학교와 교사의 역할은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종종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기 일쑤였다. 저자는 국가가 국민을 탄압하고 통제하는 기구가 아니라 합리적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을 보장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주체이자 시민의 지원자로 바로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학급 운영이나 국어 수업 속에서 어떻게 하면 학생 개인의 자율성과 평등을 보장하고 확대하며 약자를 보호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나아가 학생들이 스스로 자유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 수 있도록 교사와 학교는 든든한 지원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서두로 돌아가 보자. 아래 문장에서 ‘평범’이라는 글자를 잔뜩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지금부터 연습해서 철인 3종 경기에 도전하느니 차라리 다시 태어나는 쪽이 빠르지 않을까 생각하는 평범한 국어교사다.

국어교사는 운동을 즐기지 않을 거란 생각은 편견일 뿐이다. 하지만 ‘평범’하다는 단어가 앞에 붙는 순간, 마치 그것이 보편적인 상식인 것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어, 신장이 170cm인 사람이 “나 정도면 평범하지”라고 말했다 치자. 그 옆에 있던 165cm인 사람은 졸지에 ‘평범하지 않은 키’를 가진 사람이 되고 만다. 특정 집단을 평범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의도치 않게 다른 집단을 배제하고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다른 물음표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타인을 배제하려는 의도 없이 가치중립적인 의미로 쓴 말이라도 문제가 될까? 혹은 평범하지 않다는 건 꼭 나쁜 의미일까? 고민과 생각의 여정 끝에 마침내 여러분 각자의 마음속에 “아하, 그렇구나!” 하는 느낌표를 품게 된다면 참으로 좋겠다.     



글쓴이 소개

고등학교와 중학교, 해외 국제학교까지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퐁당퐁당 교직 생활을 했습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성격에 맞춤이라 늘 신규라는 마음으로 지냈지만, 불혹을 넘기니 이제는 한곳에 정착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은 어린이와 청소년 책을 쓰며 혁신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칩니다. 《독립운동가가 된 고딩》(초록서재, 2019)과 《백만장자 할머니와 상속자들》(꿈꾸는 돌고래, 2019)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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