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연 한양대 celera@hanyang.ac.kr
말이 주제인 만큼 이번 글도 말하듯 써 보려 합니다. 저는 읽기와 쓰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여겨지는 듣기와 말하기를 강조해 왔습니다. 루브릭을 활용한 구술평가를 하고, 사람책 도서관이라는 삶 이야기 나눔을 권장했는데 이는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지금은 역사 선생이지만 사실 저는 수학을 좋아했고 화학을 전공했습니다. 진로를 바꿔 사학과에 진학했는데 시험 답안지 작성을 하며 큰 문화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미건조한 짧은 글에 익숙했던 저에게 8절지 2장 정도는 거뜬하게 써 재끼는 인문대 학생들의 모습은 경이로움 자체였습니다. ‘나도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강단에 선 것이 스무 해 전입니다. 당시 2시간짜리 강의를 위해 하루 이틀은 꼬박 썼습니다. 그럼에도 강의에선 까먹기 일쑤였지만, 어느 순간 제 머릿속에 많은 지식이 저장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도 말로 설명하는 일이 빈번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제가 교육, 상담, 치유를 융합한 인문학교를 운영했던 경험도 지성의 통로를 고민하는 계기였습니다. 독서 경험이나 쓰기 훈련이 부족한 형편에 속한 학생들은 수업 참여가 소극적이었습니다. 그런 학생들은 일단 잘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틀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포함되어 있고요. 저는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말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때 옳고 그름이나 맞고 틀리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지 스스로 깨닫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공동체의 성원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알게 되면 어눌하게라도 자기 생각을 꺼내 놓곤 합니다. 물론 효율에 익숙한 주변 사람들의 태도는 소극적인 학생에게 자칫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때론 서러움이 폭발해서 눈물을 흘리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어요. 아! 눈물도 말이구나! 생각과 느낌을 꼭 글로만 표현할 까닭은 없지 않는가. 더구나 말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이 있지 않던가. 털어놓기라는 카타르시스! 그때부터 저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편한 방식으로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말을 선택하는 학우들이 제일 많았고, 구술평가도 하게 되었습니다.
평가라고 말하지만 저는 우열을 가르거나 순서를 매기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부득이 성적을 부여할 경우에만, 구체적 질문부터 추상적 질문에 이르기까지 점수를 차등화한 루브릭을 사용할 따름입니다. 제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과 느낌을 밖으로 꺼내 놓고, 다른 이의 그것과 비교하고 평가하면서 학생들이 스스로 해법을 찾아가는 기회를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 서문에서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으로 제시한 다양한 생각 나눔을 구술이라는 방식으로 변용한 셈이지요. 물론 그럼에도 학생들은 잘 말하지 않습니다. 말하기 훈련이 안 되어 있기도 하고 말한 내용이 틀릴까 봐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땐 아주 간단한 말하기 방법을 알려 줍니다.
1. 나는…(주장) 2. 왜냐하면…(이유) 3. 예를 들어…(논거) 4. 그러므로…(결론)
단순하지만 굉장히 효용성이 큰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학생들 대부분이 기계적으로 이 방식을 활용하여 네 문장만 말하지만, 나중에는 변형하고 확장하여 문장의 수를 늘리고 문단을 구성하기도 합니다. 최종적으로는 말한 내용을 녹음하여 글로 옮기도록 권합니다. 생각이 정리된 말은 그 자체로 글이 되거든요. 말과 글은 어차피 함께 가는 것이니까요. 글쓰기를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는 이런 방식을 더 강하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일부 학생들은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에서 서서히 벗어나기도 합니다.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은 말이나 글 이전에 자기 생각이 무엇인지 스스로 알아차리고, 이를 정리할 수 있는 역량 아니겠습니까.
공부는 읽고 쓰고 듣고 말하기가 조화를 이루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읽기와 쓰기에만 방점을 찍으면 듣기와 말하기에는 소홀하기 쉽습니다. 최근 독서 토론이 일반화되었는데, 저는 토론이 이기고 지는 논리 대결이기보다는 대화의 한 방식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화는 듣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잘 듣지 않아서 잘 말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잘 말하려면 우선은 제대로 들어야 합니다. 듣기와 말하기는 상대가 있는 행위입니다. 잘 듣는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이자 존중입니다. 듣기와 말하기 공부를 하면 인성교육을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화 과정에서 화자의 리텔링(retelling)이 이루어진다면 삶과 진로 설계에도 좋은 기회가 됩니다. 학생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리텔링, 즉 다시 쓰기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기회를 주기 때문입니다. 스토리텔링은 화자나 필자가 직접 경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감성에 호소하여 공감대를 이끌어 내는 효과적인 소통 방법입니다. 스토리텔링의 핵심 요소는 상호작용인데, 이것은 관계 맺기와 원활한 소통의 기초가 됩니다. 그런데 스토리텔링에서 주체는 어디까지나 화자, 즉 학생이 아닌 선생이기 쉽습니다. 리텔링은 학생이 주체가 되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과정입니다. 상담이나 대화의 과정에서 학생들은 자기 이야기를 꺼내 놓게 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되면, 이전과는 다르게 표현하는 학생들이 있게 됩니다. 자기 이야기를 다시 고쳐 쓰고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왜 자신의 이야기를 다시 쓰고, 다시 말하려 애쓸까요? 이는 무엇보다도 자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재탐색하고, 이로써 다른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리텔링은 기존의 스토리텔링을 단순히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첨삭을 거쳐 다르게 이야기하는 것인데요. 화자(학생)가 주체가 되어 자신만의 새로운 서사를 구축해 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학생은 자신의 세계관이나 인생관을 수정하거나 재정립하고, 자기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발화함으로써 다른 미래를 설계하고 제시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리텔링은 학생들이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좋은 기회가 됩니다. 단순히 듣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 자기가 말하는 과정에서 자기 삶의 서사를 다시 써 가는 일은 주체성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됩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이자 흑인 노예 해방 활동가였던 서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1797–1883)라는 여성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혹시 〈나는 여성이 아닌가요?(Ain’t I a woman?)〉라는 연설을 아시는지요? 1851년 그녀는 이 연설에서 나약하고 수동적인 여성성을 거부하고 흑인-여성-노예, 다시 말해 인종-젠더-계급의 교차 지점에서 구조적 폭력이 야기됨을 밝혔고, 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의 선구자가 되었습니다. 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2009년 미국 워싱턴 명예의 전당에 그녀의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구조적 차별을 전복하려는 투사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지만 문맹이었다는 점이 더욱 놀라웠습니다. 중층적인 차별을 동시에 받았던 그녀의 삶 자체가 공부요, 앎의 원천이었으니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프란츠 파농이 철학은 우리를 구조한 바가 없다며 지성의 배반을 왜 꼬집었는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그녀의 삶은 문자로만 지성을 습득하는 데 익숙했던 제게 큰 성찰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통념에 지배당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19세기 미국의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흑인에게는 자유와 평등을 부여하지 않았지요. 당시 그들도 흑인은 열등하다는 종교적 가르침을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거든요. 통념은 무섭습니다. 때때로 학생들이 자기 생각이라고 말하는 그 생각이 어떻게 자기 생각이 되었는가를 묻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회나 어른들한테서 주어진 생각, 즉 통념을 자기 생각으로 착각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자칫 통념은 학생들을 자기 생각의 주인이 아닌 허깨비로 만드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이나 성공의 조건들이 과연 처음부터 내가 구성하고 선택한 조건들일까요? 우리의 통념에 대해 성찰해 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한 공부가 됩니다.
그래서 말로 하는 삶 이야기 나눔, 사람책 도서관을 권장합니다. 사람책 도서관에서 만나는 누군가의 삶의 이야기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나 성공에 대한 통념을 넘어서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책 도서관은 학생들이 자신의 통념을 성찰하게 함으로써 자기 생각의 주인으로 살아가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사람책으로 참여하는 분들께는 성취감이나 함께 사는 즐거움을 줍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되거나 학력이나 재산, 성별, 인종과 같은 조건 때문에 변변한 기회를 얻지 못했던 분들이라면 더더욱요. 글쓰기에 비해 말하기는 교육 수준이나 삶의 조건에 덜 영향을 받기에 누구든 사람책의 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책 도서관은 다양한 세상 사람들을 생동감 있게 직접 만날 수 있는 삶 공부의 장입니다. 트루스 같은 사람책, 우리 주변에도 많을 것입니다. 책을 쓴 저자와의 만남에 더하여 말로 삶을 전하는 우리 곁의 트루스를 초대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인간을 일러 ‘호모 로퀜스(Homo loquens)’라고 하지요. 세상에 사람보다 많은 것이 사람 ‘사이’입니다. 그 사이들의 관계와 소통 그리고 공감을 위해 말보다 더 편리한 도구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말은 증삼살인(曾三殺人)이나 삼인성호(三人成虎)처럼 흉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말은 사람의 복잡 미묘한 감정뿐만 아니라 상황을 전달하는 데 아주 유용한 이기(利器)입니다. 더욱이 말은 그 무엇보다 행동을 담보하는 전제가 된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논어》의 〈공야장〉 편에서 공자가 제자인 재여에 대해 실망감을 토로했던 이유는 재여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앎과 삶을 일치시켜야 하는 지행합일(知行合一)도 중요하겠지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역시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이자 실천 과제 아닐는지요? 말이 모두의 좋은 삶을 돕는 따스한 지성의 실천으로 이어지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