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국국어교사모임 Jan 26. 2021

직장에서 동료를 만들고 싶어지는 글

김영희 수원 천천고 blog.naver.com/hehe26

인싸가 아니어도 할 수 있어요. 소극적이어도 할 수 있어요.


가슴이 뜨끈해지는 멋진 수업 사례를 들으면 마음이 달아올랐다가도 ‘동료를 어떻게 설득하지?’ 하는 생각에 머리가 차게 식는다. 수업 연구를 열심히 하는 국어교사라면 필히 챙겨 본다는 《함께 여는 국어교육》 구독자분은 이런 경험을 몇십 번쯤은 해 보셨을 테다. 선생님들 고개 끄덕이는 소리가 시공간을 초월해 2020년의 수원까지 들려오는구먼.

새로운 방식의 수업과 평가에 욕심을 가진 교사들은 대체로 ‘나는 외로운 투사가 되겠지’ 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품고 산다. 2월 교과협의회를 앞두고선 같은 학년 수업을 맡은 선생님의 스타일을 분석하고, 내 제안에 그가 보일 반응들을 미리 그려 본다. 치밀한 대응의 말들을 준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게, 되게 당연한 일 같은데 찬찬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이상하다. 아니, 여러모로 이로운 일을 하려고 하는 건데, 왜 나는 동료와의 갈등을 먼저 염려하는가. 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가. 


밑작업선생님지금부터 움직이세요 

내년에 직장에서 교사 모임을 꾸릴 생각을 품으셨다면, 지금부터 몸을 움직일 것을 권한다. 바닥을 단단하게 다져 두면 그 위에 무엇을 쌓건 휘청이지 않는다. 


최후의 보루 만들기

밑작업이라는 말이 거창하게 들리지만 어려울 것은 없다. 내 제안에 호응과 지지를 보내 주는 동료 한 명을 만들어 두면 된다.

무언가를 도모하려 할 때 가장 두려운 일은 무호응, 무응답이다. 이 사람은 함께해 줄 거라는 확신을 주는 이가 한 명만 있어도 마음이 든든해진다.

생각의 방향이 비슷한 분을 찾아가 “학교에 교사 모임을 만들고 싶어요. 뜻이 비슷한 분들과 꾸준히 수업 이야기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다들 나름 수업과 평가에 관심이 많은데, 학교에서 터놓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잡혀 있지 않아 소통이 아쉽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학교 안 교사 공동체 사례를 하나 봤거든요(그렇다, 이게 바로 이 글의 쓰임이다. 선생님들, 이 자료를 동료를 설득하는 근거로 삼으세요!). 딱히 별스럽지 않은 일을 하는데, 이렇게 하면 같은 학교 선생님들이랑 수업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대요. 진짜 좋대요! 저희도 한번 해 봐요. 사실은 내년에 교사 모임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싶은데 아무도 호응을 안 해 줄까 봐 겁이 나서…. 내년에 학습공동체를 만들 생각이거든요. 직무연수 시간을 최대한 잡아서 만들어 볼게요. 함께 해 주세요”라고 말을 하면 된다. 맛있는 간식과 차를 준비해가서 대화를 나누면 더 좋다. 나는 마켓컬리에서 파는 디저트를 애용한다. 대화에 성공하고 싶으신가요? 멋진 간식을 준비하세요. 이거 진짜 궁서체로 드리는 조언입니다. 


나는 대표에 어울리지 않는데

나는 인생에 친구는 셋이면 충분하다는 주의인데다 천성이 다정하지도 않고 인기와도 거리가 멀다. 만일 지금 독자님의 마음속에 ‘난 인싸가 아닌데. 나서서 사람 사귀는 것 못 하는데’ 하는 염려가 일고 있다면, 글쓴이를 떠올리시라. 여러분의 아싸력이 어느 정도이건, 내가 더 아싸다. 나는 밥도 혼자 먹는다.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니지만. 뭐, 그렇다고 부끄러울 일도 아니지.)

운영자의 사교력이나 외향성의 정도는 모임 성사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단, 이 점은 명심해야 한다. 휘둘리면 안 된다. 운영자는 구성원의 기분을 맞춰 주거나, 무리한 요구를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인과관계는 ‘관계가 좋으니까 모임이 잘 굴러간다’가 아니라, ‘모임이 잘 굴러가니까 관계가 좋아진다’가 되어야 한다. 대표가 정서적 부담을 지고 모임을 꾸려 나갈 필요는 없다. 교사 공동체는 성인들이 각자의 목적에 따라 선택한 결과 만들어진 집단이므로, 운영자는 그 목적 달성에만 힘을 쏟으면 된다. 모든 과정에서 구성원을 만족시키고, 즐겁게 만들어 주는 일은 대표의 역할이 아니란 의미다. 학습공동체는 구성원들 각자가 바라는 수업을 현실화하는 일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다. 운영자도 이 모임의 수혜를 입어야 하는 사람임을 잊지 말자.

이 글에선 모임의 목적이라는 말이 상당히 자주 등장할 예정인데, 이를 명확히 해 두지 않으면 운영자는 사람에게 시달리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한 해를 보내고 만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 강력한 아싸가 되거나 직장을 옮기게 된다. 절대 희생하지 마시라, 눈치를 보지도 마시라. 


그래서모임의 목적은 어디에?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니까요”, “교육적이니까요” 하는 말로 모임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았다. 철저히 교사에 초점을 뒀다. 교육에 대한 논의가 대체로 학생이 얻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그것이 아주 불만스러웠다. 교직 짬(!)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난 뒤부터 ‘교사의 효능감과 자아실현에 대해선 왜 아무도 말 안 하지?’ 하는 의문을 품고 살아왔다.

나는 우리 모임이 교사의 만족에 무게를 두고 운영되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들에게 홍보를 할 때도 “멋진 수업 하고 싶은데 혼자 하려니 힘에 부치시죠? 직장 동료와 나눌 수 있는 말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어질 수 있는지 궁금하시죠? 새로운 것 보여 드릴게요. (이때 이 문서를 활용하시라.) 어떤 학교 사례를 봤는데, 이게 정말 괜찮더라고요. 파일로 보내 드릴게요.” 하고 제안했다. 우리 머릿속에는 멋진 아이디어와 가능성이 넘쳐 나는데 교실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반절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건 너무 슬프지 않은가. 해결책을 함께 찾아보자, 머리를 모아 고민하고 대화하면 분명 더 잘할 수 있다. 이것이 모임을 만드는 목적이자 목표이다. 활동의 초점을 교사의 자아실현에 두었다.

지난해 활동이 끝난 뒤, 한 선생님이 요즘은 새로운 선생님들을 보면 기대를 하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이전까지는 취향이 안 맞겠다 싶으면 피하고 맞을 것 같으면 접근했는데, 이젠 새 얼굴이 보이면 저 사람과 내 특성을 결합하면 어떤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상상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이 우리가 학교에서 실현해야 하는 동료 관계를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자아실현을 돕는 관계,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게 만드는 관계. 


첫걸음 모임 만들기대화의 초점 세우기 

학습공동체를 활용하세요

많은 학교에서 학습공동체 활동 시간을 직무연수 이수 시간으로 인정한다. 내 경우에는 학습공동체 활동 시간을 30-45시간 정도로 아주 거대하게 잡아 버렸다. 부담스러워하실 텐데 싶겠지만 이것은 은근히 큰 매력 요소가 된다. 많은 교사들이 성과급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한 해 60시간 이상 직무연수를 듣는데, 그중 50-75%를 교내 활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제안은 매력적이다. 시험 기간 중 하루의 오후를 함께 보내기, 방학 중 1박 2일 워크숍 다녀오기를 일정에 포함하면 시간 채우는 일이 어렵지 않다. 숙박 워크숍을 간다는 말에 “엥?” 하실 수 있지만, 정말 좋다! 한 번이라도 넣어 보시기를 권한다. 밤에는 낮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대화가 오간다. 학교 예산 중 대관료를 사용하면 숙소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행정실과 이야기가 잘 되면 출장비도 받을 수 있다.

“협조를 하지 않는 분은 어떻게 하죠?”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학습공동체를 활용하면 정말 교사 공동체에 의지와 기대를 가진 분만을 구성원으로 모을 수 있다. 비협조적인 구성원 때문에 마음앓이 하는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않게 된다. 구성원을 모을 때 활동 계획을 보여 드리며 “진짜 이렇게 할 거예요. 정말 이 시간에 모여서 이 활동들 할 거예요. 빡빡할 테지만 분명히 남는 게 있을 거예요. 제가 보장할게요. 하지만 진짜 하고 싶은 분, 할 수 있는 분이 신청하셔야 해요. 실제로 참여하지 않으면 미이수 처리가 돼요.” 여러 번 강조해서 말하면 의욕이 있는 사람만이 남는다. 교과를 기준으로 학습공동체를 운영하는 학교가 많다 보니 국어교사라면 국어과 학습공동체에 당연히 가입해야 한다고 여길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편의상 하는 구분일 뿐이다. 원하는 사람이 모여 공부를 하면 된다.

많은 사람을 안고 가는 모임은 멋지다. 하지만 직장 동료로 구성된 집단을 꾸리는 것만으로도 운영자는 큰 짐을 진 상황이다. 그래서 모임에 눈치 보게 만드는 인물이 끼어 있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운영자는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다. 희생할 필요가 없다. 구성원 관리는 운영자가 건강한 정신으로 모임을 꾸려 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다. 독자님이 “저는 좋은 걸 최대한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은데요!” 하는 착한 심성을 가진 휴머니스트일 수 있다. 그래도 일단 한 해 동안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이들과 작은 모임을 꾸려 활동해 보시는 것을 권한다. 성공 사례를 경험한 후, 그래서 ‘더 잘할 수 있겠는데’, 혹은 ‘와, 재미있다!’ 이런 마음이 인다면 그때 규모를 키워도 늦지 않다. 첫 도전을 하는 시기엔 나에게 부담을 주는 모든 요소를 걷어 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앞으로 꾸준히 할 수 있다. 운영자가 즐겁게 일하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모임도 건강해진다. 


운영진이 필요할까?

운영‘진’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단, 모임 일을 공지하는 역할을 만들어 두는 건 좋다. “다음 주 수요일, 모임 날에 만나요. 잊지 않으셨죠?” 하는 식으로 매번 일정을 알려 주는 일은 운영자를 은근히 섭섭하게 만든다. ‘말 안 하면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이 사람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하는 건 아닌가? 대충하고 끝내기를 바라진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 마음이 작아진다. 부정적인 생각이 들게 만드는 요소는 미리 없애 버리는 게 좋다. 첫 모임에서 “다른 부분은 제가 챙길 테니 일정 공지를 맡아 주실 분만 있으면 좋겠어요. 자원해 주실 분을 모집합니다!”라고 말해서 담당자를 정하자.

직책을 만들 필요는 없다. 불필요한 자리 이름을 만드는 일은 모임을 딱딱하게 만들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위기가 8

학교에서 가장 분위기 좋은 곳에서 모이시라. 정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빈 교실에 책상을 붙여 모여 앉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초기엔 담임 학급에 모여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좋은 장소의 맛을 본 뒤로는 절대 교실을 찾지 않는다. 도서관도 좋고, 교내 카페도 좋다.

예산을 잘 쓰는 법에 관심이 많다. 내가 주목한 부분은 시험 기간에 교과 교사들이 식사비로 쓰는 비용이었다, 1인 1만 원 정도 지원되는 식비로 같이 밥을 먹는데, 그게 딱히 관계 증진에 영향을 미친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학교 근처 백반집에서 적당히 대화를 하며 식사를 하고 들어와 각자의 서술형 답안 채점을 하러 가는 일이 관계에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겠나. 일단 만났으면 의미 있고 밀도 높은 이야기가 오가야 하고, 예산은 철저히 그에 기여해야 한다.

교과 모임과 학습공동체의 식사비로 책정된 예산을 간식 구입비로 썼다. 좋은 분위기는 맛있는 간식에서 나오는 법! 간식을 먹기 위해 입을 열 수밖에 없으므로(!) 대화가 훨씬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학교 근처 빵집이나 카페에 먼저 결제를 해 두면 모임을 할 때마다 조금씩 헐어 쓸 수 있다. 엄마손 파이나 마가레트, 초코하임 같은 교직원 연수용 간식이 아닌 좀 더 특별한 디저트를 준비하시길 권한다. “이 과자는 뭐야?”, “이렇게 맛있는 걸 준비했어. 운영자 너무 고생한다!” 같은 감탄과 칭찬이 오가면 분위기가 한층 훈훈해진다. 간식이 기대되어서 모임이 기다려진다는 분들도 생긴다. 


무슨 이야기를어떻게 하죠?

단순히 수업과 평가 사례를 나누는 식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면 너무 딱딱해진다. 남의 수업이라 몇 마디 설명을 듣는다고 머리에 잘 그려지지도 않는다. 모든 구성원이 한 명씩 말을 하다 보면 분위기가 늘어져 집중력이 떨어진다. 예의상 하는 “좋네요, 선생님.”, “대단하시네요.” 같은 말이 오가면 안 된다. 구성원들이 이 모임을 다시 찾고 싶다고 인식하게 만들려면 이곳이 알맹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장소라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교사들이 자주 마주하는 문제 상황에 대처할 방책을 논의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면 대화 밀도가 높아진다.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동료를 보는 시선도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타개책을 함께 고민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이건 정말 중요하다.

학기 초에 교내 메신저로 “한 해 동안 수업과 평가에서 겪는 문제들의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려 해요. 이게 정말 중요하더라구요.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들을 보내 주시면 그걸 모아 1년의 계획을 세워 볼게요! 더 잘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싶었던 질문들도 좋아요.”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고 답신들을 모아 한 해 계획을 세우면 된다. 어려운 교재를 정해 두고 공부하는 모임은 권하지 않지만(나는 매번 실패했다), 문제 상황들의 목록을 늘어놓은 뒤 적절한 책을 골라 한 학기에 한 권 정도 함께 읽는 방식은 좋다. 이론서보다는 교사가 쓴 책을 고르면 현장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독서교육이 주제라면 송승훈 선생님의 《나의 책 읽기 수업》(나무연필, 2019)을, 토론교육이 주제라면 경기도토론교육연구회의 《토론이 수업이 되려면》(교육과실천, 2019)을 읽고 하루 날을 잡아 이야기를 나누는 식이다.우리는 지난해에 수행평가 결과에 불만을 품은 학생에게 대응하는 법, 모둠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을 독려하는 법, 고3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행평가 하는 법, 글쓰기 수업 멋지게 하는 법 같은 주제를 두고 이야기했다.

특정한 한두 명이 발언권을 독점하지 않게 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가르침을 받으려고 이 모임에 참여한 것이 아니므로 모든 구성원이 같은 비중과 무게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모임에 애정이 생긴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참여하는 만큼 구성원들이 확실히 뭔가 나아지고 얻는 게 있다는 확신을 갖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더욱 발언권을 고루 나눠야 한다. 공부 자리에서 사고가 예리해지고 단단해지는 경험은 잘난 이의 말을 들을 때가 아니라 내가 말을 하기 전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두 번째 걸음 변화를 즐깁시다 

시험 기간에는 뭘 해요?

물꼬방 구성원으로 10여 년을 지내며 몸으로 배운 모임 운영의 묘 중 하나는 관계의 깊이와 질은 함께 보내는 시간의 길이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매달 하루씩 열두 번 만나는 것보다 1년에 네 번, 계절마다 만나 2박 3일을 찐하게 보내고 헤어지는 게 좋다. 전자와 비교할 수 없는 만남의 농도와 밀도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점에 힌트를 얻어 시험 기간을 찐한 만남의 시간으로 만들었다. 네 시간 이상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목표. 동선은 “식사-산책-카페”로 정했다. 산책이 포함되지 않으면 실내 활동이 길어져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멋진 산책로를 걸으며 분위기를 새롭게 한 뒤 카페에 가면 다시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다.

지역마다 좋은 산책로를 낀 명소가 있기 마련인데, 수원에 사는 나는 행궁동과 인계동을 애용했다. 요즘은 공원 근처 카페에서 피크닉 세트를 대여해 주기도 하니 잠깐 시간을 들여 검색하면 동료들과 환상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직장 내 동료 관계에 관심을 두고 있는 만큼, 사람들이 만남을 기대하게 만드는 요소를 자주 고민해 보곤 한다. 학교 안 모임은 너무 좋아서 먼 길 마다 않고 찾아가는 학교 밖 모임보다 훨씬 진하고 강력한 매력 요인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찾은 답은 현실감이 없는, 환상적인 분위기이다.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멋진 이야기를 나누고,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멋진 장소에 찾아가고,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멋진 일을 직접 해 보고. 우리의 본업이 모임 운영자가 아닌 만큼, 교사 모임에 쏟을 수 있는 정신력과 시간은 한정돼 있다. 그렇다면 투입 대비 산출이 가장 큰 방법을 택해야 하는데, 구성원이 모임을 좋아하게 만드는 게 최고다. 그 이상 효율적인 것이 없다. 다른 곳에서 못 해 보는 일을 여기에선 한다, 다른 사람과는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여기에선 한다, 이곳에 오면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일으키는 것. ‘현실성 없는’이라는 말을 너무 강조해서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에스엔에스나 포털 사이트에서 지역 이름과 산책, 데이트, 피크닉 같은 단어를 조합해 검색하면 정말 많은 자료가 쏟아져 나온다. 그중 몇 개를 택하면 된다. 작은 책방이 끼어 있는 코스도 호응이 높았다.

대화에 초점을 세워 두지 않으면 붕 뜬 이야기만 하다 헤어질 수 있고 그렇다고 수업과 평가 이야기를 하자니 쉬는 느낌이 없어 아쉽다. 그때는 인생 카드를 활용하면 좋다. 정식 이름은 ‘QLAY 질문카드 인생편’인데, 인터넷 쇼핑으로도 쉽게 살 수 있다. 교과 예산을 활용하시라! 카드에는 “올해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소중하지만 잘 챙기고 있지 못한 존재가 있나요? 관계가 멀어진 친구가 있나요?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듣는 말은 무엇인가요? 그때 무슨 생각이 드나요?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자아실현은 무엇일까요?” 같은 질문이 쓰여 있는데, 이런 질문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일이 생각보다 어색하지 않다. 진짜 좋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맛있는 차를 마시며, 뒤집어 놓은 카드를 각자 한 장씩 택해 앞면에 쓰인 질문에 대답한다.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그이를 훨씬 입체적으로 알게 되는 느낌이라 마음이 뜨끈해진다. 


예산 잘 쓰기의 정점강사 섭외

학교 연수에서는 대체로 수업 잘하기로 유명한 교사를 초대한다. 법으로 정해 놓은 건 아닌데 대체로 그렇다. 찾고 싶은 모임을 만들기 위해 내가 한 일은 강사 섭외 대상을 넓히는 일이었다. 이를테면, 매체 활용을 주제로 정한 뒤 스냅 사진 촬영 작가님을 모시는 거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안내할 수 있는 사진 촬영의 기본적인 요소를 배운 뒤 모임 선생님들과의 스냅 사진 촬영을 부탁드릴 수 있다. 시험 기간의 만남이나 방학 중 워크숍 같은 야외 활동을 하는 날 연수를 하면 된다. 섭외할 때 강의와 촬영을 동시에 부탁드리고 싶다고 말하면 촬영과 실습 분량을 적절히 조정해 주신다. 지역의 문화센터 사진 강좌의 강사진을 살피면 강의 이력이 있는 분을 찾을 수 있다.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기 전엔 시와 노래를 주제로 싱어송라이터를 모셔 작은 콘서트를 열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주광색 조명이 있는 멋진 장소를 대관해서 저녁 콘서트 열기. 엄청 멋지잖아!

강사비를 잘 활용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아진다. 


어떤 점이 달라져요?

동료를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부끄럽지만 나는 이전까진 같은 학년 수업을 맡은 국어교사들을 막연히 경쟁 상대로 인식했던 면이 있었다. 하지만 대화를 시작하면 동료들을 협력하는 사람, 함께 수업을 고민하는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다.이건 정말 중요하다.

수업을 잘하기로 유명한 교사들을 찾아다니며 만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관람으로 끝난다면 마음이 공허해진다.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사부작사부작 무언가를 도모하는 일은 나를 단단하게 만든다. 실천하는 인간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동료를 만드는 일은, 분명히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일에 기여한다. 


구성원의 자아실현을 돕는 주제통합수업

국어교사 학습공동체가 재미있다는 소문이 나니, 다른 교과 선생님들이 관심을 보였고 “그러면 같이 해 볼까요?”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참에 독서교육을 제대로 해 보고 싶다고 손들어 주신 선생님들과 2019년 여름방학에 수업 계획을 세우고 2학기에 주제통합수업을 시작했다.

2019년 천천고등학교에서는 국어-사회-영어-한문 교과의 주제통합수업이 진행됐다. 사회 부조리/불평등에 초점을 두고 단행본 한 권을 읽은 뒤 네 개 교과가 함께 수업과 평가를 했다. 진행 과정에서 단편소설 한 편과 3-4장의 영어 원서가 추가 투입됐다.

이 활동이 남긴 첫 번째 의미는 수업/평가 과정과 결과에 대한 교사의 만족이 높았다는 점이다. 하나의 교과에서 사회상을 다룬 책을 읽고 수행평가를 할 경우, 일반적으로 읽기(+일지 쓰기)-자료 수집-글쓰기(초고 쓰기와 고쳐쓰기 포함)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때 시간에 쫓겨 활동을 몰아치다 보면 어찌저찌 결과물을 받긴 했지만 입맛이 개운치 않을 때가 많다. 평가의 전 과정을 작은 항목으로 나누어 채점할 수는 있다. 가령, ‘책 대화하기’ 수행평가를 일지 10점, 자료 수집 10점, 구술 10점, 글쓰기 10점으로 분리하면, 한 학기 수행평가를 큰 덩어리의 활동 하나로 끝낼 수 있다. 그러나 나처럼 간이 작은 교사는 수행평가에 한 달 남짓 시간을 들이는 게 부담스럽다.

교과 특성에 맞춰 활동을 나눠 맡으면 각 단계를 충실히 밟을 수 있다. 이를테면, 시수가 많은 교과에서 학생들에게 책을 읽히고 일지를 쓴 뒤 채점한다. 천천고에서는 김동식의 《회색인간》(요다, 2017)을 읽었다. 국어과에서는 4차시 동안 충분히 시간을 들여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법을 설명하고 실습한다. 평가는 학생이 쓴 자료 수집 계획서와 제출한 자료 수준을 바탕으로 한다. 사회과에서는 논설문을 쓰는데, 이때 국어 시간에 수집해 온 자료를 활용한다. 국어교사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자료를 글감 삼아 글쓰기를 하는 것이라 평소보다 결과물의 완성도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사회과에서는 학생들이 사례를 충분히 제시하고 타당한 대안을 마련했는지 여부로 평가한다. 영어과에서는 원서로 로알드 달의 《찰리와 초콜릿 공장》(Puffin Books, 2007)일부를 읽는다. 사회 불평등을 주제로 하는 수업이므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담은 특정 장들을 읽고 영어 에세이를 쓴다. 원서를 이해하기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위해 국어과에서는 동명의 영화를 본 뒤 매체 분석 수업을 하는 식으로 영어 수업을 돕는다. 국어교사 입장에서도 이 수업이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동안 영화 수업에서 주제를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에 쫓겨 미학적 특성을 논할 시간이 없었는데, 주제통합수업에서는 영어과에서 주제를 다뤄 주니 국어과에서는 형식적인 면에 무게를 두고 수업을 할 수 있었다. 한문과에서는 두보와 정약용의 한시를 학습한 뒤 불평등을 주제로 5언 절구를 쓴다.

여러 개의 교과에서 각자 1-2주일을 들이는 방식으로 활동을 나누면 시간에 대한 부담은 줄면서도 알맹이 있는 활동이 가능하다. 각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전해야 하는 본질적인 내용이 더 명료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 활동을 경험하며 교사들은 ‘아, 내가 애들에게 미치고 싶은 영향이 이런 것이었지’ 하는 만족과 성취를 느꼈다. 수업과 평가를 통해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하는 일은 정말 멋지다.

주제통합수업의 두 번째 의미는 같은 학교의 동료들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대화, 함께할 수 있는 작당에 대한 기대감과 상상력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앞으로 뭔가를 더 해 보고 싶다, 이 사람들과.’ 하는 기대를 일으키는 것 이상으로 지속 가능한 활동을 보장하는 동력은 없다. ‘교사로서 자아성취를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구나. 동료와 함께라면 가능하구나.’ 이런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학교 안 교사 모임의 목표이자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결국 주제통합수업도 크게 보면 교사들의 소통 방식에 대한 고민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각자가 바라는 수업의 모습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 막연히 이랬으면 좋겠다고 여겼던 걸 교과끼리 힘을 모으고 서로 보조하면서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그 과정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인가. 그런 고민들이 주제통합수업을 성공으로 이끌어 가는 열쇠가 된다. 


세 번째 걸음 다음을 준비해요 

중간에 힘이 빠진 적은 없어요?

사람을 만나는 일인 만큼, 심지어 직장 동료와의 만남인 만큼 기력이 빠지거나 야속한 마음이 드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그럴 땐 자아존중감이 쭉 추락하는데, 그때 ‘아니야,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하고 생각할 만한 근거가 필요하다.

이때 바깥 모임은 큰 역할을 한다. 좋은 교사 모임, 혹은 사회인 모임에 몸담는 일은 그 자체로 큰 힘이 된다. 모든 활동이 흥할 순 없다. 참석률이 낮을 때도 있고, 운영자의 판단 실수로 그날 만남 자체가 망해 버릴 수도 있다. 항상 잘되는 것을 기본으로 정해 두면 안 된다. 열 명 가까운 사람이 모이는 자리인 만큼 다양한 변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하자. 만남일의 1/3 이상은 아쉬움이 느껴지는 게 당연하다. 이런 상황에서 운영자가 해야 할 일은 모든 변수를 치밀히 예상해서 미리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는 든든한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는 일이다. 우리의 본업이 모임 대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좋은 모임의 구성원이 되는 일은 집단의 좋은 문화를 배워 오게 한다는 점에서도 아주 큰 의미가 있다. 나는 동료와 맺어야 하는 관계 방식, 인간과 나눌 수 있는 대화에 대한 기대, 환상적인 분위기가 사고에 미치는 영향, 개인이 집단의 덕후가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물꼬방이라는 멋진 집단에서 경험했다. 그리고 내가 배운 그 좋은 것들을 천천고의 학교 안 모임에서 실현해 나가고 있다. 


운영자가 없어도 모임이 유지되나요?

문 닫을 가능성이 크다. 100%다.

하지만 좋은 모임에 몸담아 본 경험, 동료 교사들에게 지지를 받은 경험은 나를 포함한 모임 구성원 모두가 언제든 본인이 필요할 때 담대하게 판을 벌일 수 있는 힘이 되리라 믿는다. 먹어 본 사람은 맛을 아는 법이니까. 동료가 필요할 때 우리의 2019년, 2020년을 떠올리며 ‘그렇게 해 보면 되지’ 생각하고 가볍고 발랄하게 새로운 모임의 문을 여는 것이다.

열 명의 사람이 모였다면, 한 해가 지났을 때 열 개의 씨앗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나를 제외한 아홉 중 하나만 싹을 틔워도 그 사람이 만든 모임에서 맛을 아는 사람이 또 생겨날 테니, 나는 내가 없어진 뒤 당장 우리 모임이 사라지더라도 전혀 아쉽거나 속상하지 않다. 모임의 생리는 원래 그런 것. 필요할 때 필요한 사람이 다시 만들면 된다.

게다가 이 모임의 목적은 교사 공동체를 꾸리는 것이 아니라 만족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사람을 근처에서 만들기, 수업과 평가를 바꾸어 나가는 데 있었으므로 그것을 이루었다면 충분하다. 모임 유지는 집단 운영의 목적과 목표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끝을 아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다운 법

한 해가 끝나면 모임도 끝난다. 사람에 따라 특정 시기의 관심사가 달라지기 마련이니 그해가 끝나면 공식적으로 활동을 종료하고 다음 해에 새로운 구성원을 모은다. 사람을 중심으로 이끌어 가는 모임은 언제부턴가 이 모임에서 무엇을 얻는가가 아니라 안쓰러움과 미안함에 초점을 두고 굴러가는 조직이 되고 만다. 그건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다.

12월 마지막 모임에서, 멋지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공식적인 종료를 선언하는 것이 가장 멋지다. 


마무리 학교 안 교사 모임의 목적은 

동료님이 “난 요즘 수업이 망해도 그렇게 비참하지가 않아. 수업 시간에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국어 시간엔 이런 이야기를 해야지 싶은 걸 여느 해보다 충실히 하고 있거든. 내가 하는 말에 자부심이 있어. 수업이 망하면 우리끼리 맛있는 것 먹으면서 대책 생각할 일이 기대돼, 솔직히.”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들을 때에도 울컥했는데, 옮겨 쓰고 있는 지금도 울컥한다.

나는 이것이 학교 안 교사 모임이 필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에 소신을 가질 수 있도록 지지와 응원을 해 주는. 우리가 하루에 만나는 학생은 백 명이 넘는다. 내 수업과 활동을 좋아하는 학생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당연하다. 그날따라 컨디션이 좋지 않아 교사에게 날 선 반응을 보이는 학생도 있을 테고. 수많은 이런 일 저런 일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기둥이 되어 주는 사람들을 직장에 만들어 두면 마음이 든든하다. 그리고 정말 신이 난다!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나, 이 수업이 내 교과가 담아내야 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가. 교사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여기서 찾아야 한다. 백여 명의 학생이 보이는 반응을 일일이 근거로 삼는 일은 위험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혼자 하는 건 부담스러우니까. 뭐가 잘났다고 혼자 이런 생각을 해 싶으니까. 공동체에서 각자의 소망을 듣고 용기를 이끌어 주고, 가능성을 응원하고, 협력이 필요한 부분에 충분히 도움을 주는, 그런 공동체가 필요하다. 맛있는 것도 자주 먹고(웃음).

나는 좋은 공동체를 개인의 선택에 힘을 실어 주는 집단이라고 정의한다. 우리 모임은 아직 완벽하진 못하지만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 개인의 선택에 힘을 실어 주는 집단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나는 물꼬방에서 이상이 현실이 되는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우리 모임에서 조금씩 실현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가 되겠다.

학교 안 교사 모임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에 힘을 실어 준다는 점에서 분명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든다. 

+후기) 2019년 3월 아홉 명으로 시작한 국어/한문과 학습공동체는 “내년에 함께하실 분?”이라는 질문에 서른 명이 손을 드는 집단이 되었다. 이런 꿈을 꾸는 일은, 그리고 조금씩 실천해 나가는 일은, 분명히 힘이 있다.



  

글쓴이 소개

채식을 합니다. 페미니스트이고요. 절주인입니다. 내향적인데 모임 만드는 게 취미예요.

이전 06화 코로나19 이후, 학교의 미래를 고민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