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훈 영동 추풍령중 wkwn21@naver.com
추풍령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이미 도시 생활, 학교생활에 지쳐 있었다. 비정규직 교사로 5년을 근무하면서 나는 언제든 교체가 가능한 부품으로 기능했고, 완전히 마모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해 보려고 했다. 그러다 우연히 추풍령중학교와 인연이 되었다. 어느 날은 눈이 소복하게 내려앉았고, 어느 늦은 밤 퇴근길에는 별 무더기들이 빛났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게 느껴졌던 학교의 첫인상을 지금도 자세히 묘사할 수 있다.
이런 장면을 매일 보고 자란 학생들이 부러웠다. 한편 엄청난 부담을 느꼈다. 3년 동안 국어교사라고는 나밖에 만날 수 없는 학생들에게 어떤 국어 수업을 선물할 수 있나 생각하면 괴로웠다. 내 실력만큼만, 내 상상만큼만 배우고 성장하게 될 학생들을 위해 더 많이 공부하고 상상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찍질했다.
추풍령에서 6년을 보내는 동안 내 수업은 ‘민주주의자의 첫 공부’로 어느 정도 방향을 잡았다. 세월호, 제주 난민,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 사건, 기업 살인, 퀴어 혐오. 내 삶을 흔든 굵직굵직한 일들이 있을 때마다 수업의 방향을 가다듬었다. 나와 인연 있는 학생들이 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반(反)지성의 폭력에 동조하지 않았으면 했다. 더불어 학생들이 자기 삶의 터전부터 혐오하지 않고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했으면 하는 생각에 수업에 ‘마을’에 관한 내용을 추가하였고 가장 최근에는 기후 파업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그레타 툰베리’와 ‘기후위기’까지 추가했다.
추풍령중학교 학생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향의 산과 들이 주는 힘을 마음 어딘가에 저장해 두고 조금씩 조금씩 꺼내 쓰는 삶을 살아 낼 것이다. 내 삶이 바삭거릴 때, 유년 시절 방학 때마다 농촌에서 지내며 얻은 경험들에서 감성의 샘물을 길어 내었듯이, ‘민주주의자의 첫 공부’로 국어 수업에서 배운 것들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수업 시간에 접했던 가치들을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꺼내어 쓴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코로나19가 여전히 힘을 쓰고 있고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학교가 감내해야 했던 충격은 엄청났고 그걸 감당해낸 교사 집단은 좀 멋졌다. 《함께 여는 국어교육》 여름호를 펴 놓고, 지난 8월 물꼬방 온라인 연수를 들으면서 위기의 시절을 건널 용기를 얻었다. 어수선한 시절에도 좋은 수업으로 학생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려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고, 그동안 삐걱거리던 내 수업을 떠올렸다. 계속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했던 시간이 쌓여 조금씩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무모함과 용기, 어딘가의 교차점에서 매일 수업하고 매일 반성한 기록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다. 이렇게 담아낸 작은 학교의 수업이 누군가에게 영감으로 닿게 되길 바란다.
마을을 읽는 수업
추풍령 작은 마을은 재발견될 가치들을 품고 있는 보물 창고이자 우리 학생들이 넘어야 할 현실이기도 하다. 점차 왜소해져 가는 마을과 이러한 어려움에도 품위를 잃지 않고 살려는 사람들을 수업으로 연결하고 싶었다. 삶의 현장으로서의 마을을 수업에 담아내고 싶었다. 그래야 학생들이 존재를 배반하지 않고 자율성을 회복하는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기 주변의 사는 모습을 공부하면 마을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고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다. 학생들이 자율성을 회복하면 더 행복해진다. 더욱 다양한 삶들이 섞이면서 좋은 삶과 좋은 사회로 나아갈 가능성이 커진다. 간디가 기계화, 산업화된 문명에 맞서 물레를 돌린 것처럼, 학교는 마을을 수업에 담아 삶과 교육을 다시 연결할 수 있다.
하나. 우리 마을 인물 지도 그리기
2014, 2015년에 교내 인문 독서 동아리 ‘도담도담’에서 마을의 이야기꾼인 큰어른을 찾아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조사하여 책으로 펴냈다.마을 공부의 첫걸음이었다. 2016년부터는 학교 교육과정 안에 마을을 읽는 수업을 포함했다. 1학년 자유학년제에서 국어, 사회, 영어 교과통합으로 시도한 ‘우리 마을 인물 지도 그리기’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다. 마을을 공부하면서 주민들을 면담하고 그 내용을 학생들이 직접 그린 마을 지도 위에 기록한 후 마을 곳곳에 대한 설명을 추가해 입체적인 모양을 갖춘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순
‘민주주의자의 첫 공부’는 계속된다
학생들에게 배움의 내용과 과정을 결정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선 더 세밀한 수업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3년 동안 추풍령중학교 학생들이 만나는 유일한 국어교사로, 학생들이 지나치게 성글게 배우게 될까 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한다. 2019년 첫 크라우드 펀딩 등록이 무산되었고 2020년 코로나19 확산으로 지구를 지키는 체인지메이커 활동 중 거리 캠페인을 하지 못하면서 결국 수업 목표 일부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계획이나 경계를 촘촘하게 세웠다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려는 학생들이 더 큰 보람을 얻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고 아쉽다. 학생들의 삶과 배움이 통합될 수 있도록 더 깊이 배워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한편 교과서나 교과, 학교의 안과 밖을 마음껏 넘나들고 학생들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수업이 더 많이 시도되고 사례들을 나누면 좋겠다.
코로나19에도 작은 학교는 바삐 돌아간다. 인구 밀집도가 높은 곳은 예외 없이 활동이 제한되는 코로나19 시대에 중단 없이 배울 수 있는 작은 학교들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전교생이 매일 등교하며 지내니, 코로나19로 대전환이 필요한 시대 학교의 적정 규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작고 느린 추풍령중학교는 오래된 미래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게 되었다.
마을을 담다 보니, 마을을 닮은 삶을 살게 되었다. 인류 멸종의 위기 앞에서, 문명에 맞서 지구를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도 느낀다. 도시 큰 학교에서보다 농촌 작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서 은근 자존감이 높아졌다. ‘촌에 산다’는 말이 이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충남 금산에서 온 청년 활동가들의 말처럼, 시골에 산다는 건 엄청 힙한 일이 되고 있다. 마을과 생태주의를 공부하면 할수록 점점 그렇게 느껴진다. 촌놈에서 힙스터로 바뀌는 수업, 그게 마을과 생태를 담은 수업이며 ‘민주주의자의 첫 공부’다. 삶의 터전을 무대로 삼는 수업의 가치를 교사와 학생들이 꼭 경험해 보면 좋겠다.
‘마을’과 ‘생태’, ‘민주주의’를 담은 수업을 고안하고 실천하려는 모든 선생님께, 때론 실패하고 좌절하지만 ‘다시’ 도전하는 선생님들의 마음에 존경의 인사를 보낸다.
저는 ‘다시’라는 단어가 그렇게 부드러워요. 다시 하고 싶어 하는 마음, 다시 잘해보고 싶은 마음, 실수를 만회하고 용서받고 다시 힘을 얻고 다시 깨졌던 관계는 복원되고. 어쨌든 ‘다시’라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 이미 있는, 새로 출발하는 능력요.
- 이슬아(2019), 〈한 번이라는 감수성〉, 《깨끗한 존경》, 헤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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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에서의 마을 교육 사례는 백윤애 외의 《마을로 걸어간 교사들, 마을교육과정을 그리다》(살림터, 2020)에 장곡중학교 사례가 잘 소개되어 있다. 마을 교육의 철학적 기반을 공부하고 싶으면 서용선 외의 《마을교육공동체란 무엇인가》(살림터, 2016)나 성미산학교의 《마을학교(성미산학교의 마을 만들기)》(교육공동체벗, 2016)를 읽어 보면 좋겠다. 언제나 물꼬방 선생님들의 수업 실천에서 큰 영감을 얻는다. 특히 김영희 선생님, 김병섭 선생님, 송동철 선생님, 구본희 선생님의 수업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