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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Mar 22. 2020

불확실한 현재와 닮아있는 영화 <버닝>

에디터 SU의 쉐어컬쳐

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일상의 소중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다소 움츠려진 일상이지만, 그 안에서도 분명 살아가기 위한 일련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곳, 현실이 다소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분명 해야 할 일들과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지만, 세상은 느리게 흘러만 갑니다. 그러다 문득 이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한동안 열병처럼 나를 물들게 했던 이 영화. 어쩌면 지금의 상황과 이 영화는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영화 <버닝 >입니다. 

불확실성의 세계

종수(유아인 분)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해하기 어려운 공간입니다. 분노조절 장애로 사고를 치고 재판을 받고 있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못 견디고 어렸을 때 떠났던 어머니.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종수에게 연락해 태연하게 돈을 빌려줄 수 있냐고 말합니다. 아버지 친구인 변호사는 아버지가 피해자에게 정식으로 사과하고 탄원서를 제출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버지는 자존심 때문에 결국 형을 받고 감옥에 가게 됩니다. 해미(전종서 분)의 가족들은 (해미가 말했던) 어릴 때 살던 집에 있던 우물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종수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부자로 살고 있는 벤(스티븐연 분)은 매일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하는 종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종수는 서울은 모르는 게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종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종수의 가족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연결되어 있는 영속성이자 그로 인해 발생하는 단절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부모 세대의 물질이나 환경이 그대로 대물림되면서, 이 시대의 젊은이는 노력과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업보를 갖게 됩니다. 그 업보는 누구에게는 윤택하고 평생 일을 안 해도 살 수 있는 여유가 되지만, 누구에게는 카드빚을 갚아야 되는 현실이 됩니다. 하고 싶은 일은 있지만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대물림된 간극. 그 간극이 분출되는 Burning은 분노이자 슬픔입니다.

어릴 때 어머니의 부재와 함께 아버지로부터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한 종수는 애정이 낯설기만 합니다. 종수는 우연히 동창생 해미를 만나게 됩니다. 종수는 해미를 통해 받은 애정이 낯설지만, 자신의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종수의 결핍은 트라우마입니다. 결핍은 두려운 감정이 되고 집착의 괴물이 됩니다. 해미가 사라졌을 때 종수는 하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해미를 찾는데 집중합니다. 해미가 죽었는지, 어디론가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종수의 관찰자 시점에 집중합니다. 순수하지만 예민한 종수가 바라보는 상황은 종수가 만들어낸 결핍의 허상일 수도 있습니다. 해미에 대한 종수의 감정과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벤의 등장은 어쩌면 시기와 질투가 만들어낸 종수의 상상과 허구일 수도 있습니다. 

힌두교에서는 새해에 홀리 축제를 연다고 합니다. 첫날은 '올리카'라는 악마를 태운다는 의미에서 횃불을 지피고. 서로 간에 품고 있던 시기심, 질투, 증오감, 차별 등도 함께 태운다고 하는데요. 영화 <Burning>은 원했던 삶이 아닌, 대물림되는 업보에 대한 젊은이들의 Burning(분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벤에 대한 질투와 시기, 증오를 Burning(화해) 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희망의 메시지도 담겨있습니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의 불확실성과 모호함, 불안은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지인에 의해 좌지우지됩니다. 안타깝지만 비교는 현실이니까요. 눈을 감는다고 안 보이는 것이 아니고, 피한다고 피할 수 없습니다. 나와 그 이외에 것들. 나를 둘러싼 현재와 현상. 벤이 하는 일 없이 계속해서 다른 여성을 찾는 모습을 바라보는 종수는 현실에 얽매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신과 비교하게 됩니다. 비교가 종수의 집착을 이해할 수 있는 해답일 수 있습니다. 해미가 말했던 '그레이트 헝거'가 삶과 정신적으로 굶주린 상태를 의미한다면, 그 굶주림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결핍이자,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어렵고 힘들지만, '그레이트 헝거'에서 이겨내라는 극복의 버닝을 이야기합니다.

어쩔 수 없지만 우리는 인정하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그 상황이 우리에게 때로는 힘듦과 고통을 주기도 하는데요. 누군가 말했던 불확실성이 인생의 본질이라고 했던 것처럼. 결국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언제쯤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묵묵히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나아간다면. 이 또한 지나갈 것이고, 지난 간 삶 역시 현재이자 과거이겠지요. 잘 이겨내시길 바랄게요. 에디터 SU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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