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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SU Mar 31. 2020

영원이 된 기억,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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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에디터 SU입니다.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남들보다 늦게 학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한동안 마음에 맞는 친구를 찾기가 어려웠는데요. 아침 일찍 첫 번째 강의가 끝나고 다음 강의까지 애매한 시간이 남았던 그때 나와 비슷하게 뭘 할지 몰라 서성이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알게 된 친구는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만, 둘 다 처지가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빨리 친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동아리에 가입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친구의 제안에, 개인적으로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친구의 손에 이끌려 '시향'이라는 독서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이 들어왔다며 환영회를 열어줬습니다. 몇몇이 모여 자취를 하는 꽤 큰 방에 10여 명이 모여 술을 마시며 놀았던 날. 저 또한 이런 분위기가 신기하기도 해서 친구와 나름 재밌게 분위기를 즐겼습니다. 결국 차가 끊겨 오가 지도 못해 저는 방 한구석에 웅크리며 잠을 청했습니다. 술자리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마루며 방이며 아무 데나 누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저는 벽 쪽에 기대 잠을 설치며 빨리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새벽 달빛에 친구의 얼굴이 비쳤습니다. 문득 내가 친구의 얼굴을 정면으로 봤던 적이 있을까 싶었고, 그 분위기만큼이나 낯설게 친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때 친구도 슬며시 눈을 떴습니다. 친구 역시 잠을 설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한동안 서로 빤히 쳐다봤고 또 쳐다봤습니다.

친구의 무표정한 눈빛은 새벽 달빛에 비쳐 반짝거리며 빛났습니다. 어느 순간 내 마음속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올라오기 시작했고. 알 수 없는 감정은 급기야 눈물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도저히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찬 기운이 도는 새벽 거리로 나와버렸습니다. 택시를 타고 꽤 비싼 교통비를 지불한 후 집으로 돌아왔고. 그 이후로 정확히 어떤 감정이라고 설명하기 힘들었지만 그 친구를 편하게 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친구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저의 감정은 혼돈으로 바뀌었고, 서늘한 1학기를 보내고 나서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그 친구와의 관계는 끊긴 지 오래되었지만, 가끔 SNS에 올라오는 친구의 소식은 그 옛날 묵혀뒀던 감정을 불러일으키곤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이라고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그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어쩌면 옛날 감정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감정 선과 유사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오늘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마리안느'(노에미 멜랑 분)는 원치 않는 결혼을 앞둔 귀족 아가씨 '엘로이즈'(아델 에넬 분)의 결혼 초상화 의뢰를 받습니다. '엘로이즈' 모르게 그림을 완성해야 하는 '마리안느'는 비밀스럽게 그녀를 관찰하며 알 수 없는 감정의 기류에 휩싸이게 되는데요. 수녀의 삶을 살았던 '엘로이즈' 역시 '마리안느'와의 교제를 통해 첫 자유 순간을 공유하면서 '마리안느'에 대한 친밀감과 매력은 커지게 됩니다. '엘로이즈'의 초상화는 곧 그들의 사랑에 대한 확인과 증거의 과정을 겪게 되며, 영화는 점차 이들의 사랑을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합니다.  

영화는 18세기 프랑스가 배경인 시대극입니다. 여성 화가로서 정해져 있는 관습과 규제, 그리고 원치 않지만 결혼을 해야만 하는 여성들. 또 그런 이유 때문에 맞게 되는 죽음.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아이를 유산시켜야만 하는 여성들의 삶. 영화는 이런 과정들을 시종일관 여성들의 연대와 끈끈한 우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겪게 되는 18세기 여성들의 삶 속에서 섬세한 감성과 한 장면 장면들이 화폭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고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여배우죠. '아델 에넬'은 귀족 신분으로서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운명에서 낯선 사랑의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얻고 있는데요. 개인적으로 상대역으로 열연한 '노에미 멜랑'의 매력에 한동안 헤어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강렬한 눈빛과 화가로서 가지는 묘한 예술적 감성들이 빠짐없이 영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요.

오히려 '아델 에넬'보다 '노에미 멜랑'을 위한 영화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노에미 멜랑'은 아름다운 외모 속에 중성적인 매력을 겸비해 다소 복잡한 감정을 연기해야만 하는 '엘로이즈' 역할에 최적의 선택이었다는 평을 얻었는데요.  크리스틴 스튜어트와 엠마 왓슨 닮은꼴로 주목받고 있는 '노에미 멜랑'의 매력이 더 궁금하신 분은 <큐리오사, 2019>를 보시면 왜 그녀가 프랑스 신예인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큐리오사,2019년 作>

사랑은 기억입니다. 사랑의 감정은 변하기 마련이고, 아련했던 기억은 찰나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 못 견딜 정도로 밤이 길었던 그날 역시 기억입니다. 피가 안 통할 정도로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그의 큰 손도 기억의 끝자락이죠.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에 대한 찰나의 기억을 계속해서 꺼내게 만듭니다. 밑도 끝도 없이 만나 키스하고 잠자리를 갖는 것 또한 사랑일 수는 있겠지만, 기억으로 고이 남기는 사랑은 그렇게 빠르지 않습니다. 얼굴에 손을 데기도, 손 한번 잡기도, 살결과 냄새에 취해 몇 날 며칠을 잠 못 자고 괴로워하다 얻게 되는 사랑은 설사 이별을 맞이한다고 해도 오랫동안 잊히지 않기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는 사랑은 무엇인가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제72회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 후보로 영화 <기생충>과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고 하는데요. 옛사랑의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에디터 SU는 다음에 찾아뵙겠습니다.


https://www.shareus.co.kr/lecture/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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